출판사 서평
시큼 떨떠름한 맛이 나는 인생?
술독을 덮고 잠시 기다려보면
어느새 새콤 달달한 술이 만들어질 테지
막걸리를 마셔만 보고 만들어본 적은 없는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막걸리가 귀엽다는 사실이다. 물과 쌀, 누룩으로 만든 재료를 버무려 술독에 담아두고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에 놓아두면 누구든 막걸리의 귀여운 면모를 마주할 수 있다. 내가 먹고, 자고, 놀고 있는 동안에 술독 안의 막걸리는 발효라는 아주 기특한 행위를 이어간다. 술독에 조그마한 공기 방울이 톡톡 올라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보글보글 탄산 끓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직원 여럿을 두고 몸 편히 매장을 굴리는 사장이라도 된 듯, 술통 안은 달콤한 불로소득의 현장이 되어 맛난 술이 만들어진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고 버려지고 도태되는 게 인생이라고? 조급함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막걸리는 새로운 정답을 알려준다. 무엇을 부러 더 하지 않아도 괜찮은 때가 있다고, 작고 귀여운 미생물들에게 그 기다림의 시간은 향과 맛을 더해주는 필수적인 순간이라고. 혹여 술독 뚜껑을 열어 맛본 술맛이 아직 시큼 떨떠름하다고 해서 실망하기는 이르다. 막걸리는 엄연히 살아있는 술이니, 우리가 실망하는 순간에도 더 나은 맛과 향을 위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자본가로 태어나지 못한 이상
노동은 인간의 숙명이라고?
그렇다면 차라리 행복한 일을 할래!
왠지 막걸리라는 건,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온 양조장을 물려받는다거나 전통문화나 지역을 살리겠다는 대단한 결심에서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 한구석 빨간 벽돌 건물에 자리 잡은 이 작은 양조장은 둘 다 아니다. 어느 날 또다시 회사에서 튕겨 나온 사회초년생의 머릿속에, 사부작사부작 막걸리를 만들어 파는 삶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게 얼렁뚱땅 막걸리 초짜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술 빚는 법을 배우겠다고 온갖 막걸리 강좌를 찾아다니고, 심지어는 건너 건너 소개받은 양조장에서 제발 일하게 해달라고 읍소해 양조장 인턴이자 객식구가 되기도 했다. 신규 창업자를 지원해 준다는 사업에 몇 번이고 서류를 제출하며 종내에는 법인까지 세우고, 내가 만든 막걸리 브랜드를 알리겠다는 목표 하나로 캐리어에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며 보따리장수가 되어 원데이 클래스를 하고 다녔다. 월세라도 벌어보겠다고 수제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어 팝업 바를 운영했다가 대차게 망한 건 덤이다. 여기서 참 이상한 사실이 하나 있다. 회사원 시절에는 ‘워라밸’을 생활신조로 삼았으나, 지금은 어느새 일과 삶이 하나로 합쳐져 버린 ‘워크 이즈 라이프’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라밸을 지키려 애쓰던 때보다 어째서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것도 미생물이 부린 마법일까?
망한 줄 알았던 내 인생
뒷걸음치다 빠진 술독에서
나란 사람의 진짜 맛과 향의 찾다!
그렇게 막걸리를 팔아 먹고살겠다고 다짐하고 매장을 오픈한 지 19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게 이름을 내건 수제 막걸리를 출시했다. 누군가는 내게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니냐고, 그래서 한 달에 얼마나 버느냐고 따져 묻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 그런 시선들이 무엇이 중요하리오. 내 입맛에 맞춰 최고의 맛과 향을 담은 이 술을 맛보려고 오늘도 조그만 양조장을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으니, 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비틀비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뒷걸음을 치면 물에 빠지거나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적어도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지는 줄 알았던 날들에게 이제는 안녕을 고하자. 어쩌면 삶이 버거워 한 발 물러선 그 자리에, 우연찮게도 당신만의 술독이 얌전히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안으로 퐁당 빠져버린 순간부터 당신의 인생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익어가기 시작하겠지. 당신만의 향과 당신만의 맛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