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꿀참나무 가지에 가려진 파란 하늘이
숨바꼭질 하는 오솔길
도토리 입에 문 청설모 한 마리가
곧추선 나무가지 위로 도르르
뒤쫓는 내 눈길이 부시다
전후戰後, 허기지던 시절이 생각난다
--- 「|한국대표서정디카시선 |, 도토리 숲길, 곽병열」 중에서
거리에는 찬바람이 대지에는 눈발들이
모든 것을 감싸안은 숨막히는 이 고요
오늘이 흘러가느라
길이 꿈틀, 거린다
얼어붙은 강물처럼 갇혀버린 희망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 부서지는 약속들
겨울이 늑장을 부려도
너는 꼭 찾아오리
얼음장 밑에서도 땅속 깊은 뿌리에도
끊임없이 솟구치며 숨을 쉬는 물의 맥
보아라 푸릇해진 쑥
아지랑이 들녘을
--- 「|한국대표서정시조선 |, 온다면 오는 봄, 김민정」 중에서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슬픔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차마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리면서
눈물 한 종재기라도 흘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늘의 날은 이미 깊이 저물어
또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곳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더디게 만날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입니다.
--- 「|한국대표서정시선 |, 좋은 일, 구재기」 중에서
눈이 내린다
펑펑
쏟아지는 수많은 생각들
그 중에서
지우고 싶은 일을 골라
지우개로 지워낸다.
부끄러운 생각들이 하얗게 부서져
송이송이 지우개똥으로 내린다.
차곡차곡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덮기 위해
난타로 흩날리는 눈송이
수북하게 쌓아 놓은 눈길
뽀드득뽀드득
한숨을 쉬면서
또다시 발자국을 남긴다.
--- 「|한국대표서정시선 |, 눈 내리는 날, 김관식」 중에서
아 -
이건 내 안의 것
다 드러내보는 몸짓
아 아 -
밥줄에서 창자까지
나는 모두 이것들뿐이건만
야청 하늘
품는 듯 스며들고 마는
아, 미타彌陀여!
--- 「|한국대표서정시선 |, 달무리, 김난석」 중에서
안개 자욱한 숲속 공원
부슬부슬 여름비가 조용히 내린다
흔히 볼 수 없는 노천카페 아침
개구리와 맹꽁이 가족들이 준비한
합창이 요란하게 시작되고
메타쉐쿼이어 나무 사이로 퍼지는
안개구름의 연출도 감동적이다
구욱꾹 꾹국 간간이 빈 공간을
채워 우는 비둘기 화음까지
환상적인 비 오는 날의 노천카페
탁 트인 원두막 기둥에 기대앉아
따뜻한 찻잔을 들었다
그대여
이 온전한 자연의 연출을
위하여
--- 「|한국대표서정시선 |, 노천카페 2, 김영기」 중에서
무겁게 드리워진 암막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나의 볼을 부빈다.
진한 블랙 커피가 혀를 자극하고 쓰디쓴 원두향이 코로 흡입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짜릿한 행복에 젖는다.
알게 모르게 자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가령 사랑하는 자녀의 성적이 우수하게 나왔다든지,
힘겨운 다이어트에 성공을 했다든지,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배려와 친절을 선물 받는다면 이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족을 위해서 침대 시트를 정돈하고
하얀 빨래를 건조대에 가지런히 널고
뽀송하게 마른 눈부신 빨래를 개어 서랍에 넣을 때,
해가 질 무렵이면 종종걸음으로 알뜰하게 장을 보고 정성이 듬뿍 들어간 저녁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리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은 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을이면 가는 곳마다 울긋불긋 예쁜 옷으로 갈아 입은 단풍을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첫눈이 소리없이 소복히 쌓이면 창을 열고 첫눈이 왔다고 소리친다.
눈 위를 걸어 보라 뽀드득 뽀드득.
인공 눈으로 만든 스키장에서의 눈은 절대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느끼는 소중한 감정이 바로 행복인 것이다.
천재지변만 아니라면 만들어 가면서
노력하면서 가꾸어 나가는 게 행복이 아닐까.
아침에 세탁한 눈부신 흰 빨래를 예쁘게 개면서 보드라운 빨래 살갓에 코를 대어 본다.
자연의 향기가 내 코를 자극한다.
--- 「|한국대표서정시선 |, 행복의 기준, 김은경」 중에서
독거 어르신의 집은 골목길 끝에 있다.
해가 가장 늦게 드는 곳,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자리다.
봉사자들은 주소를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작은 철문 앞에 선다.
녹슨 문고리는 계절을 잃은 채 시간을 붙들고 있고,
벨은 여러 번 눌려도 기억을 잃은 새처럼 울지 않는다.
봉사자들이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린다.
소리는 이내 사라지고 침묵만 철문을 단단히 붙는다.
돌아서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공기 사이로 마른기침 하나가 흘러나온다.
부서질 듯 얇은 소리, 어르신의 작은 신호다
문이 열리자 어르신이 구부정하게 걸어 나온다.
안경 너머 시선에는 반가움과 경계,
그리고 오래 혼자였던 침묵의 무게가 비스듬히 기울진다.
봉사자들이 어르신의 집 안으로 들어선다.
움직임을 잃은 공기, 방 안은 조용하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만이 방바닥에 길게 누워 하루의 온기를 공급한다.
어르신이 물을 권한다.
컵 안에는 지나온 계절들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
봉사자들의 온기가 방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손에서 손으로 옮겨 붙은 체온이 낡은 벽지의 주름 사이에 스며든다.
돼지고기 뭉턱뭉턱 썰어 넣은 김치찌개, 보글보글 숨을 쉬며
오늘과 어제,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까지 한 냄비 끓여낸다.
봉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설 시간이 다가오자
방 안의 햇살도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신발을 신는다.
어르신의 하루하루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지만,
오늘의 온기가 이불 속에서 어르신의 등을 따뜻하게 떠받친다.
--- 「|한국대표서정시선 |, 독거 어르신의 집, 김은희」 중에서
굴복이 쉬운 일상 탓하지 않는다
가장자리 작은 풀꽃 예뻐하고
지나고 나면
아침의 순진이
정오의 열정으로 타올랐다가
황혼으로 가라앉는 게 순리
‘누구나 그래.’에서
덜 벗어나며
오기의 힘줄로 상심의 절벽 버티는 이웃과
토닥이는 아픔 나누고
모래시계 속 모래 한 알 같은 시급에 감사하고
연민의 초석礎石, 속 깊게 다지면서
--- 「|한국대표서정시선 |, 그 자리서 순하게, 김현희」 중에서
아내가 외출하여
흑염소를 찾아왔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리비에르‘ 찻집에 앉았지.
창밖의 드들강은
비를 맞으며 잠자듯 고요히 흐르네.
강 건너 마을은
안개에 묻힌 듯 만 듯 오수에 잠겨 있고.
강가의 이름 모를 물풀은
바람에 너울거려 고요를 흔드네.
아내를 앞에 두고 아린 나를
드들강이 다독이듯 안아 주네.
강이여, 흘러라.
비야, 내려라.
--- 「|한국대표서정시선 |, 드들강의 고요, 김호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