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번역은 제 길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번역에 대한 갈망과 그에 수반되는 절망으로 괴로워하는 번역가와 번역가 지망생들은 무수하다. 심지어 늘 번역을 그만두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여전히 번역에 대한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쟁쟁한 번역가들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수한 무명 번역가들이 오늘도 원고와 사전을 놓고 씨름하며 남몰래 자신만의 꿈을 키워간다. 번역이라는 일에는 분명히 가스레인지의 불이 꺼져도 보글보글 뚝배기를 끓어오르게 하는 여열과도 같은 기대와 희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번역가의 일》은 이름난 번역가의 작업 루틴과 번역에 얽힌 뒷이야기를 풀어 보여주는 기존의 책과는 조금 다르다. 이름 석 자 한 번 알리기도 어려운 수많은 번역가들과 번역가 지망생들처럼, 어느 날 하루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가 다음 날엔 어김없이 쪼그라들고 마는 보통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번역을 향한 여정은 마치 마라톤을 뛰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도 42.195킬로미터의 정식 코스보다 훨씬 더 힘겹고 긴 거리를 뛰어야 하는 울트라 마라톤이다. 일감 하나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샘플 번역 테스트에 도전해야 할뿐더러, 그 기회조차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다시 실패하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해야만 겨우 번역할 기회 한 번을 얻는다. 운이 좋아 번역가로 데뷔했다고 해서 곧바로 안정적인 일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제 막 데뷔한 무명 번역가에게는 앞으로 더 뛰어야 할 거리가 끝도 없이 남아 있다. 안정적인 위치에서 잘나가는 번역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평소에는 다른 캐릭터로 살다가 새벽이나 늦은 밤, 혹은 주말이면 번역가로 변신하는 소위 엔잡러들이 많은 이유다.
작가에게 번역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매는 일이다.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는 무시무시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다가도 초벌 번역이 끝나갈 즈음에는 그 불씨가 힘을 잃는다. 직역에 가깝게 옮겨놓은 문장을 보면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머릿속 극장에서는 마감을 제때 해내지 못한 비극적인 결말이 상영된다. 아직 업계의 장인이 되지 못한 어설픈 번역가는 몇 달간 이어진 새벽 작업으로 내려앉은 눈 밑 다크서클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거친 단어의 조합을 매끄럽게 다듬어서 번역문 안에 녹여내려 고군분투한다. 단어 하나에 파르르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려 애쓰면서. 자기 삶에서 이 책을 번역하는 기회는 이번 단 한 번뿐임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책의 추천사를 쓴 김난주 번역가는 번역하는 사람의 꿈과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은 소통과 전달의 도구이기에 번역에는 숙명적인 불완전함이” 뒤따른다. 한없이 완벽을 향해 다가서려는 허우적거림과 그럼에도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그 꿈의 순간. 그렇기에 번역가는 갈증과 타협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나날에 자신을 오롯이 내맡긴 채, 내면의 모든 열정을 불태워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이란 끝이 없는 기다림과도 닮았다. 동시에 어느 때는 그러한 기다림이야말로 희망의 다른 이름이 되어 번역가를 버티게 해준다. 번역가에게 기다림은 또 다른 가능성을 맞이하기 위한 시간이나 다름없으므로. 오직 책과 문학에 대한 열정 하나로 지난한 번역 작업의 괴로움을 견디고 있는 무명 번역가의 희망에 찬 고백은 오늘도 자신만의 꿈을 향해 더디게 나아가는 모든 이에게 감동적인 울림을 전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책 속에서
도자기 장인들은 성에 차지 않는 완성품을 가차 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친다지만, 아직 장인이 되지 못한 어설픈 번역가는 어떻게든 거친 단어의 조합을 매끄럽게 다듬어서 번역문 안에 녹여내려 고군분투한다. _p.8
번역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와 같았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결코 손에 닿지 않았다. 새벽마다 꾸준히 이어오던 번역 연습도 내려놓았다.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_p.28
어떤 일을 시작하든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특히 번역에 막 입문한 초짜에게는. _p.41
기쁨과 환희의 순간은 찰나이고, 인생의 나머지 시간은 그 찰나를 꿈꾸며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_p.53
번역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날이 과연 내게도 올까. 작업비 100원을 다시 올리려면 앞으로 몇 권이나 번역을 더 해야 할까. 아니, 그때까지 잘 버틸 수나 있을까. 오지 않은 미래는 불확실하고, 어쨌든 당장의 미션은 이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다. _p.62
첫 역서가 나온 지 오래지만, 여전히 초심을 유지하는 중이다. 좋게 말해 초심이지, 사실 작업 하나가 끝나고 다음 역서를 맡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번역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초심으로 돌아가고 만다. _p.91
같은 원문이라도 누구의 시선이 머물렀는지에 따라 옮기는 단어의 농도는 변하고 읽는 이의 감정 이입도 달라진다. _p.203
오늘도 현실의 나는 번역 일감을 얻기 위해 수시로 번역 에이전시의 수주 게시판을 들락날락한다. 눈이 빠지게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샘플 번역 원고를 작성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시도는 자주 실패하고 종종 성공한다. _p.208
번역은 저자가 문장으로 완성해놓은 세상을 여행하는 일이고, 역자 후기는 그 여행기나 마찬가지다. _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