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250년 전 연암이 비웃은 얼굴,
오늘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이라는 제목을 안다.
하지만 연암의 소설은 제목만 알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생생하다.
양반 신분을 사놓고 그 실체를 알고는 겁을 먹고 달아나는 부자, 도덕군자인 척하다가 호랑이 앞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유학자, 세상을 읽는 눈은 탁월하지만 끝내 구조 전체를 바꾸지 못하는 지식인.
이 인물들은 조선 후기의 낯선 등장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회의실에서도, 조직 안에서도, 어쩌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타이틀은 탐내지만 그 무게는 지기 싫어하는 사람, 정의를 말하지만 자기 욕망 앞에서는 누구보다 초라해지는 사람, 세상을 꿰뚫어 볼 만큼 똑똑하지만 끝내 현실은 바꾸지 못하는 사람.
연암의 소설이 250년이 지난 지금도 힘을 잃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꿰뚫어본 것은 조선이라는 시대가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인간의 허위와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연암이 벗겨낸 것은 양반이 아니라
인간의 허위였다
정민 교수는 연암의 문장을 두고 “한 군데 못질한 흔적이 없는데도 꽉 짜여져 빈틈이 없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다”라고 평했다.
「양반전」은 그 칼날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빚을 갚기 위해 양반 신분을 파는 가난한 양반, 그리고 그것을 사들인 뒤 증서 속 ‘양반의 삶’을 읽다가 질겁하고 물러서는 부자.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연암은 신분제 자체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권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비되며, 사람들은 왜 그 허울에 기꺼이 매달리는지를 정밀하게 해부한다. 양반제도는 사라졌지만, 양반의 얼굴은 형태만 바꾼 채 여전히 살아 있다.
「허생전」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허생은 무능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단돈 만 냥으로 시장을 흔들고, 국가 경제의 허점을 간파할 만큼 뛰어난 통찰을 지녔다. 그런데도 그의 능력은 끝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연암은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썩은 구조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구조를 지탱하는 것이 결국 명분과 체면, 권위의 허상이라는 점까지 함께 드러낸다.
「호질」에서는 그 체면이 가장 극적으로 무너진다. 도덕을 입에 달고 살던 유학자가 사실은 욕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음이 드러나고, 그는 호랑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우습다. 그런데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 장면이 지나치게 낯익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 작품에서 조선을 풍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인간 전체를 겨냥한다.
세 작품는 길지 않다. 하지만 짧다고 가볍지는 않다. 타이틀 하나에 사람이 왜 쉽게 흔들리는지, 이름뿐인 권위가 왜 실력보다 먼저 먹히는지, 허위라는 걸 알면서도 사회는 왜 그 가면을 계속 떠받드는지, 연암은 몇 장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 민낯을 순식간에 들춰낸다. 책을 덮고 나면 문득 남 얘기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체면과 허위가 한 겹씩 벗겨지고 나서야, 한 사람의 진짜 알맹이가 무엇인지 묻게 되기 때문이다. 연암의 소설은 바로 그 질문을 독자 마음속에 오래 남긴다.
문장은 차갑게, 삶은 뜨겁게
연암의 문장을 만든 것은 연암의 삶이었다
박지원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실학자, 천재 문인, 북학파의 수장. 그러나 그 몇 단어만으로는 지금까지도 독자를 멈칫하게 만드는 그의 예리한 문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연암은 한양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지배층이 당연하게 여기는 질서를 끝까지 의심한 사람이었다. 그 시선은 사회가 비천하게 여기는 똥거름장수를 ‘선생’이라 부르고, 양반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허세와 욕망을 끝까지 파헤치게 했다.
청나라 사신단에 동행한 후 쓴 『열하일기』는 집필 단계부터 필사본으로 퍼져나가며 조선 지식사회를 뒤흔들었다. 몰락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에 기대어 현실을 외면하던 시대에, 연암은 청의 발전을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조가 그의 문체를 지목해 문체반정을 단행한 것도 그 문장이 시대의 질서를 흔드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연암의 문장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작품 바깥의 삶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차가운 문장 뒤에는 뜨거운 삶이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순을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의 부름으로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가 자신이 주장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뜻을 실천하려 했다. 굶주리는 백성을 사비로 구제했고,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손수 반찬을 만들어 자식들을 먹였으며, 삶을 마무리할 시점에는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 당부했다. 조선도 양반 계급도 아닌 인간 자체를 꿰뚫은 그의 문장은 관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현실과 맞부딪치며 살아낸 사람이기에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이토록 정확히 그려낼 수 있었다.
웃음으로 시작해 우리의 민낯과 대면하다
연암을 다시 읽게 만드는 결정판
현대지성 클래식은 현실을 꿰뚫는 연암 소설의 힘을 가장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연암을 새롭게 읽는 방식을 제안한다. 무엇보다 연암 이전에는 어디서도 본 적 없었던 독보적인 소설의 근원이 된 그의 삶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에 공을 들였다. 기존에 한자리에 묶어 수록했던 작가의 서문을 각 작품 앞에 배치하고, 말미에는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박지원의 모습을 함께 실었다.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연암이 어떤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았는지,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그 배경까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또한 낯선 시대의 장벽 앞에서 독자의 호흡이 끊기지 않도록 풍속과 제도, 인물과 표현의 맥락을 짚는 418개의 각주를 촘촘히 달았다. 또한 풍속화·궁중기록화·민화, 연암이 직접 그린 그림과 현대 일러스트까지 담은 29점의 이미지는 문장으로만 머물던 조선 후기의 풍경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되살린다.
웃으며 읽기 시작한 연암의 문장은 어느 순간 우리를 멈춰 세운다. 그가 해부한 것은 250년 전 조선의 낡은 제도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작동하는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간판이 권력이 되고, 허세가 권위를 대신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래서 연암의 소설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그려낸 인간과 사회의 구조는 지금도 새로운 양반의 얼굴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