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삶의 기원과 역사를 묵언처럼 담아낸 완미한 정형미학
<길 위의 생>에는 오래 침전된 삶의 기쁨과 슬픔을 다양한 시점과 언어로 변환하여 발화하는 시인의 깊은 사유와 감각이 숨쉬고 있다. 정형 양식의 단정함 안에서 시인은 차분하고도 정제된 시점과 언어를 보여주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시조라는 양식적 특성을 따라 그만의 세련되고도 심미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정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구심적인 사유와 감각을 응집해내는 견고하고도 생동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번 시조집은 그러한 사유와 감각과 표현을 통해 현대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진경進境을 보여주는 사례로 훤칠하게 다가오고 있다. … 그의 시편들은 일차적으로는 존재론적 현기眩氣를 수반하는 감각의 차원을 지향하지만, 어느새 그 안에 다양한 미학적 전율을 환기하는 남다른 사유 과정을 정성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세계 안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투사投射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존재와 언어의 확산을 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내 안에 푸른 싹을 틔우는
언어의 뿌리를 탐색하면서
간직하고 싶은
시조 나무를 마음에 심었다.
이 시조집에 심은
예순아홉 그루의 시조 나무
불편한 가지는 잘라내어
자유를 주었고
잘못 내린 뿌리는
과감히 도려냈다.
-2026년 신록에, 정현숙
책 속에서
<아버지의 만년필>
먼 길을 떠나시며 내 손에 쥐어주신
아버지 일부였던 생전의 만년필은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직필의 붓이었다
흐릿한 등불 아래 안경을 고쳐쓰며
그 많은 거친 세월 밑줄을 그어 오신
아버지 얼룩진 먹물 지워지지 않습니다
막막한 습작의 삶, 원고지 칸 건너가듯
세상일 힘들어도 되돌아보면 먹물 한 자락
오늘도 참회하듯이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백지를 메워가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몸의 가장 깊은 시간을 가로질러
아버지 만년필 잡고 언덕 하나 넘습니다
-14쪽
<북극곰의 눈물>
다대포 모래밭에 쏟아지는 붉은 노을
세상의 모든 고요 평화를 거느리고
한 바다 장엄하게도 홀연히 입멸入滅한다
그 위에 빙하 떠난 북극곰과 철새, 펭귄
따뜻한 파도 타고 정박한 어진 그들
지구가 너무 뜨거워 난민처럼 된 걸까
어쩌리, 산성비가 잠든 이 해안에서
순금 빛 조각들의 눈물이 완성되고
인간이 벗어 둔 신발 신고 어슬어슬 멀미한다
소음을 깔고 누운 침묵의 언어 앞에
우리가 한 일들 앞으로 해야 할 일
우우우 지구를 위해 유서로 쓴 우화 한 점
* 2025.4.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김길만 모래조각가가 다대포해수욕장 모래사장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북극곰과 펭귄이 다대포 해안까지 밀려올 수 있다는 점을 모래조각 작품으로 표현, 기후 변화의 위기감을 담아냈다.
-15쪽
<한계령에 들어서며>
협곡의 고요마저 입적을 한 이 저물녘
갈 길은 저만큼인데 눈은 다시 쌓여가고
어스름 초저녁별이 서둘러서 하산한다
바람은 왁자지껄 솔가지의 눈을 털고
썰렁한 마음 마당에 홀로 와 들어앉은
오늘 밤 눈송이 하나 공중 속에 떠 있다
그 어떤 말과 빛깔 눈보다 진실할까
산맥에 갇힌 옷깃 기웃기웃 찾아드는
한계령 내경에 들어 한 사람을 생각했다
바서진 그대와 나 아직 남은 묵언들이
얼음장 꽝 깨지듯 열렸으면 참 좋은 날
봄 길목 내생을 깨워 녹의 한 벌 지으리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