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1부는 ‘다 늙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커다란 고아원’ 같은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홀로 텔레비전을 보던 의자를 고쳐 달라고 공방을 찾아온 할머니(「할매 옥수수」), 설날 밤 자식과 다투고 지척의 이웃집에서 아침까지 잠든 만수 할배(「만수 할배 실종 사건」), 혼자 죽어 봉투에 장례비를 남겨 둔 김 영감(「삼일장」). 쇠락의 풍경 속에서도 절뚝거리는 몸으로 옥수수를 삶아 이고 오는 할매처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상호 부조의 감각이 잇따라 흐른다.
3부에는 안동과 의성 들판의 이주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베트남에서 온 프엉이 들깨 한 마지기를 혼자 다 치는 동안 파리 올림픽 중계는 계속되고(「파리 올림픽」), 봄눈을 처음 본 인도네시아 청년 둘이 동시에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봄인가 하면 한 번씩 눈이 내렸다」). 시인은 이 존재들을 고발이나 연민 없이 기록하며 이렇게 쓴다. “서로 다른 색깔끼리/서로 다른 크기끼리/엎치고 덮쳐 피워 내는/우리는 지금 비꽃”(「비꽃」).
그럴 줄 알았으면 산에서 그냥 죽을 걸 그랬어요
아버지가 죽고 아재가 죽고 아무개가 죽고
개돼지처럼 사람이 죽고 사람처럼 개돼지가 죽고
기어이 죽일 거였으면 결국은 죽을 거였으면
그 푸른 바다는 건너지 말 걸 그랬어요
그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지 말 걸 그랬어요
코발트 레드
빛나는 피바다를 건너 나는 이제 집에 갈래요
어멍 아방 묻혀 있는 섬으로 갈래요
―「코발트 레드」 부분
이 시집의 가장 무거운 목소리는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 연작에 있다. “도대체 지금 나는 왜 죽고 있는가”라고 묻는 목소리, 집에 가고 싶다고 서성거리는 목소리, “어여 어여 나오그라 집에 가자” 하고 부르는 목소리. 시인은 방언과 구어를 끌어들여 공식 언어가 지워 버린 희생자들의 말을 되살린다.
문학평론가 노지영은 해설에서 피재현의 시를 ‘혼맹(魂盲)’의 시대에 맞서는 ‘시의 마음’으로 읽는다. 타인의 혼을 인식하지 못한 채 경쟁과 효용만을 추구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피재현의 시는 지워져 가는 존재들과 온전히 교류하며 공동체의 근원적 감수성을 복원하려 한다.
작품 속으로
밤새 내린 눈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눈과 사람 사이에 오간 찰나의 생명
잠깐 살다 가는 것은
사람이나 눈사람이나 마찬가지
눈 코 입 달아 놓고
그새 휜 등을 쓸어 본다
밤새 녹아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눈사람」 부분
노인들만 사는
우리 마을은
커다란 고아원
엄마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가 없어
밥때도 놓치고
숙제하라고 다그치는
엄마가 없어
마당 가득 풀밭이다
우리 마을은
다 늙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커다란 고아원
―「우리 마을」 부분
먼저 죽은 사람들은
어디 멀리로 간 것이 아니라
곳곳에 숨어서 살고 있다
내가 듣기로 사람이 죽으면
몸은 그림자도 없이 투명해지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생전에 궁금했던 어떤 시점에 가 보기도 하고
지근거리에서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기도 하면서
지낸다고 한다
어제,
몸살이 나서 창가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가
역광으로 비치는 아버지의 실루엣을 보았다
투명 인간이 되었지만 여전한 불투명 인간이어서
왼손을 허리춤에 얹고 걷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버지였다
허리 병을 고쳐서 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갑자기 가 버리셔서 그러지 못했다
―「숨어 사는 사람들」 전문
모래 더미를 토닥거리며 집짓기 놀이를 하던 어린 내가 마흔여덟이 되어 손수 깎은 문패를 걸었다 이 집에 온 그해 여름 아버지 어머니를 모셔 온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집 둘레를 몇 바퀴나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셨다 아버지는 문패를 가진 적이 없었다
―「문패」 부분
그럴 줄 알았으면 산에서 그냥 죽을 걸 그랬어요
아버지가 죽고 아재가 죽고 아무개가 죽고
개돼지처럼 사람이 죽고 사람처럼 개돼지가 죽고
기어이 죽일 거였으면 결국은 죽을 거였으면
그 푸른 바다는 건너지 말 걸 그랬어요
그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지 말 걸 그랬어요
코발트 레드
빛나는 피바다를 건너 나는 이제 집에 갈래요
어멍 아방 묻혀 있는 섬으로 갈래요
―「코발트 레드」 부분
불은 길을 내면서 동시에 달렸습니다
의성에서 영덕까지 그 험한 산길을 순식간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그랬습니다
가로막는 모든 걸 태우면서
우리가 고속 도로를 낼 때 그랬습니다
나무를 살해하면서
새를 도륙하면서
산을 뚫고 강을 건너며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기어이 불길을 만들고 바다까지 달려갔습니다
불은 우리가 낸 길을 따라 달렸습니다
쉴 틈조차 없어 고속 도로 휴게소를 태우면서
그만 멈추라는 표지판도 태우면서
인정사정 보지 않고 내달렸습니다
우리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불은 모든 걸 다 태우고서야 멈췄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활활 타는 중입니다
국경을 넘어 달립니다
대기권을 벗어나 달립니다
길도 아닌 곳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불길」 전문
시인의 말
미래에 대해 생각하니 미래가 걱정이다
벌써 오래전에 미래에 도착했는데
죽은 시인이 남긴 시를 자주 읽는다
시를 읽는 동안 꽃은 지지 않고 기다렸다
이상한 시간이었다
2026년 5월
피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