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천사
이 시집, 힙하고 쿨하다. 젤다의 전설과 슈퍼 마리오, 탕후루와 EDM, 버거킹과 드래곤볼을 오가는 김남규의 시는 X세대와 MZ세대를 빠른 템포로 넘나든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집의 곳곳에서 깊은 서정과 슬픔을 발견할 수 있다. 일견 트렌디하게 보이는 이 시집은 유행어와 밈과 픽셀 그래픽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이 시대의 고독, 유행이 다 끌어안지 못한 외로움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김남규 시인은 시대의 표면을 경유하여 ‘힙’과 ‘쿨’로는 다 정의되지 않는 뜨거움과 진득함을 통해 오래된 슬픔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의 온도를 펼쳐낸다.
“미로에서 무한까지, 마음에서 마지막까지(「ㅁ에게」)” 파고들며 슬픔을 다루는 방식은 섬세하고도 아름답다. 미로처럼 어지러운 현대의 한복판에서 마지막까지 마음이 도착할 자리를 마련해두는 것. 그것은 언어로서 마음을 섬세하게 발견하는 태도이며, 언어의 가장 작은 단위인 자음 하나까지 집중하는 시인의 자세다.
“우리가 애써 그은 밑줄마다 꽃은 피고 또 지고/종이의 흉터에 목적 없이 골몰하면서”(「공부가주」), 우리가 이 시집에 그은 밑줄은 책의 흉터가 되고, 흉터에는 견뎌온 자의 꽃이 필 것이다. 공부는 결국 알고 있던 사실들에 상처를 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대를 읽으면서도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슬픔을 안으면서도 슬픔에 잠기지 않는 균형이 이 시집을 더욱 묵직하게 만든다. 시를 통해 삶의 비의를 찾는 일을 시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힙과 쿨을 넘어 오래오래 손 안에 남는 온기로.
― 이혜미(시인)
그는 기사(騎士)다, 아니, 말 탄 사람이다. 무구(無垢)한 투구를 쓰고 무사(Mousa)의 여신을 경배하는, 말(言)이라는 말(馬)에 올라탄 사람. 하지만 그는 직립할 줄도, 걸을 줄도, 달릴 줄도 안다. 말 없는 말로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물음표를 물과 음표로 만드는 여름밤의 기술, 몽당을 몽땅으로 만드는 기술, 현재완료로 말하며 미래완료를 보여주는 기술, 우리가 4월마다 배우는 기술 - 말을 다 쥐어짠 수건 속의 사막이 사랑이라는 침묵의 오아시스라는 것. 두 발 달린 마음을 두 발 달린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그는 마음 없이 기도하는 밤으로부터 도주하고, 내일을 향해 질주하고, 사랑을 위해 연주한다. 모든 게 시라고 우기며, 사계절을 다 쓰는 씩씩한 그의 가을은 언제일까?
― 박현익(문학박사)
책 속에서
<한 바퀴>
꽃 하나 문 열고 인사하는 아침이야
나무가 새를 붙잡듯 모든 말에 붙잡힌 우린
시 첫 행
손에 쥐고 입에 물고
한 바퀴
돌기로 해
무늬는 무늬끼리 고달픈 법이래
창문의 감시 받으며 착하게 밤을 지키자
하루를
필사하는 마음으로
한 바퀴
더 돌까
<복수>
매번, 시 앞에서
창피당한 나는 말이죠
세상 모든 시집을 샀어요
복수를 다짐했으니까요
시집을
다 찢어발기고 나서
몇 개의 부사만
간직합니다
버려진 시들 모으고 꼬아
세상 튼튼한 밧줄 만들어
영원 가까이 내려갑니다
혹시 보면, 끊어주세요
오래전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날 잡아먹을
겁니다
<1>
자초(自初)에서 지종(至終)까지 이야기는 멈췄지만
답하지 않는 마음 오해하지 않을 마음
숫자가 없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면 없어질까
피 안 통하는 자세로 숫자가 벌서고 있어
읽다가 만 책처럼 하루 종일 무능하지
ㅇㅇ은 환유로 읽어야 해 두 발 달린 마음처럼
<젤다의 전설>
하늘 위 하늘
땅 아래 땅
살아가는 것도 일이라지
외눈박이든
반인반수든
눈을 피하면 안 되는 곳
공주는
또 언제 납치당했는지
보스전이
눈앞인데
곧 부서질
칼과 활 들고
하루씩 버티는 씩씩함
두 발 달린
이야기는
월드맵 저 먼 곳까지
먼 훗날
필사본으로 남을 거다
그것이 바로
시집이지
<반의반의 반에 반의반의 반>
시침이 숫자에 떨어지기 직전이었어
나는
저기까지만
너를
생각할 거야
분침은
손 흔드는 일 같아서
쉬지 않고
손짓했는데
시침은 숫자를 형식상으로 지나칠 거야
반의반
또 반의반
비극은
거짓처럼 오고
이제야
돌아온 것은
돌아오지
않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