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열대와 신화, 석유와 혁명, 끝없는 투쟁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어느 3대 가족의 기이하고도 찬란한 연대기
스스로 전설이 된 재규어의 후예들, 그 마술적인 모험담
소설은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연대기를 펼쳐 보인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밑바닥의 삶을 살다가 운명을 딛고 전설적인 외과의사가 된 안토니오, 시대의 편견에 맞서 그 지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아나 마리아, 불꽃 같은 영혼을 품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대양을 건너 유럽으로 향한 그들의 딸 베네수엘라, 그리고 어머니의 나라에 돌아와 이 모든 이야기를 소설로 기록하는 그녀의 아들 크리스토발까지, 3대에 걸친 인물들의 이야기가 유려하게 몰아치는 입담으로 펼쳐진다. 그밖에도 이들의 삶을 가로지르는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곳곳에 등장하여 서사에 입체적인 생명력을 더한다.
베네수엘라의 도시 마라카이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석유의 발견, 연이은 독재정치와 투쟁, 혁명과 그 실패 과정에 이르기까지 파란 많은 베네수엘라의 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전개된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저마다의 모험과 투쟁을 이어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경쾌하고도 장엄한 필치로 그려진다. 야성을 간직한 채 자신만의 길을 가는 ‘재규어’들처럼, 이들은 주어진 운명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불완전하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인물들, 찬란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이들의 이야기는 한 편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모험담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또한 마술과 샤머니즘, 유령, 환상 등 곳곳에 가미되는 마술적 리얼리즘과 풍요로운 신화적 상상력이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와 매혹을 더한다.
책 속에서
안토니오를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미래는 그저 자리를 잘못 골라 태어난 죄로 죽을 때까지 고독을 끌고 다녀야 하는 거리의 부랑아에게 약속된 운명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이대로는 결국 방탕한 인간들과 범죄자들, 아름다움과 영원히 멀어진 자들, 이제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게 된 절망적인 인간들이 들락거리는 초라한 술집들을 전전하게 될 게 뻔했다. 그러다보면 결국 지금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된 자들, 그를 두들겨 패려는 자들, 심술궂고 오만한, 교육이라고는 호수의 난폭한 삶과 수전노 같은 아버지들에게서 배운 게 전부이고 꽃 하나 피지 않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을 지닌 자들과 똑같아질 터였다. _24~25쪽
몇 년이 지난 뒤 그날 주위에서 터진 조롱의 웃음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그때 자신의 내면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처음 꿈틀댔음을 깨달았다. 바로 투쟁의 피였다. 그녀의 혈관 속에서 잠들어 있던 여성들의 계보가 순식간에 깨어났다. 아마존 맥에 올라탄 마리아 리온사의 피 묻은 단검, 아마조네스 여왕의 활, 아나 마리아 캄포스의 존엄한 자태, 아그노디케의 짧게 자른 머리, 도미틸라 플로레스의 영웅적인 순교, 그들 모두가 말에 올라서 과거라는 요새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아나 마리아는 자신이 두 가지 싸움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의학을 위한 싸움이었고, 하나는 여성을 위한 싸움이었다. 자신이 왜 다른 학생들처럼 여관과 술집에 드나들 수 없는지, 어째서 실수를 하면 안 되는지, 왜 성공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지 뼈저리게 자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지식의 힘,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드는 앎이 자신을 승리로 이끌어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_142~143쪽
안토니오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는 위대한 외과 의사였지만 당장 딸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가장 높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수백 번의 연설을 했고, 수술실에서 죽음을 무찌르면서 수없이 많은 승리를 거뒀으며, 그 어떤 힘겨운 복병이든 모두 극복해왔지만, 아마도 고집쟁이 혈통으로부터 유산을 이어받았을 아이, 눈 속에서 불길이 이글거리는 저 용감한 아이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지워져버렸다.
안토니오는 딸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패배하게 될 것임을 깨닫고 저항을 포기했다. 그는 딸을 앞에 앉히고 마지막 조건을 제시하며 항복했다. 그렇게 그는 딸이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게 될 말을 건넸다.
“좋다. 가도록 해.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거라.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의 노예가 되고, 하지 않은 말에 대해서는 주인이 된다.” _279쪽
출발 전날, 꾀꼬리들이 아직 잠에 빠져 있을 시각이었다. 아나 마리아는 신문을 읽고 있고 베네수엘라는 짐을 거의 다 꾸려갈 즈음, 정원의 망고나무에서 한 여자가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내려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더러운, 무릎이 까지고 손에는 나뭇잎이 가득한 인디오 여인의 유령은 땅에서 제일 가까운 가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린 뒤, 오래된 나무껍질 냄새를 풍기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베네수엘라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말없이 여자를 눈으로 따라갔지만, 아나 마리아가 딸보다 먼저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말 못하는 테레사야.” 아나 마리아가 말했다. “드디어 자기 나무에서 내려왔구나.”
테레사는 마치 인사를 하려는 것처럼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였고, 그런 뒤에는 마치 그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거실과 두 곳의 복도를 지났고, 현관문을 열더니 한마디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_281쪽
박수 소리가 안토니오를 몽상에서 깨웠다. 이제 포드 자동차를 타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될 거리를 돌아볼 차례였다. 자동차 디딤판에 올라서는 순간에도 안토니오는 그의 젊음이라는 시멘트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긴 사람들을 떠올렸고, 폭력과 용기가 공존했던 그 어린 시절을 자신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았다. 차가 출발했고, 개들이 차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안토니오의 이름이 마치 추기경이 거리 행진을 할 때처럼 도시의 확성기에서 여러 번 울렸지만, 정작 그의 귀에는 멀리서 울리는 아나 마리아의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법 같은 꿈에 젖은 그의 눈앞에 임신한 아나 마리아가 가운 차림으로 그의 유일하고 진정한 업적을 몸속에 품고 집안 복도에 서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_311~312쪽
“책을 읽는 것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과 같단다.”
그러나 떠남으로 채워진 유년기를 보내던 크리스토발에게 책 읽기는 오히려 제자리에 머물기였다. 도시들이 바뀌고 다른 언어들이 계속 등장하고 여러 문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동안, 책만은 변하지 않았다. 리스본에 있든 로마에 있든 카라카스에 있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든, 그의 젊음을 채운 소설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쓰다듬기 좋아하는 무성한 갈기를 지닌 짐승 곁에 머무르듯, 그렇게 책들 곁에 머물렀다. 동물의 털처럼 부드러운 커버로 덮인 책등과 제목의 친숙한 글자들은 그에게 국가들의 이름보다 더 든든한 안정감을 주었다. 책을 읽는 것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책장은 금속과 마노와 같은 부동성을 지닌다. 크리스토발은 잉크와 종이 결이 이루는 기하학적 구조에 심취했고, 그 석화된 왕국들에 매달렸다. 미궁 속에서 길을 잃어도 매번 더 좋은 길을 찾아냈고, 그때마다 똑같은 아름다움의 깃대와 마주쳤다. 바로 그곳에 인간의 변함없는 토대가 있고, 혼돈을 피해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떠나지도 쫓겨나지도 않는 항구가 있다. 소설은 육지로 둘러싸인 섬이다. _327~328쪽
크리스토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주의자였던 그에게 부패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유령일 뿐이었다. 그는 부패란 자본주의라는 나무에서 자라는 사과이며,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만이 그 사과를 먹고, 그러다가 탐욕에 대한 벌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부패가 과잉의 딸로 태어나서 자신의 곁에서도 자랄 수 있다고, 혁명이라는 축축한 토양 안에서 바로 그 부패와 싸우는 자들에게서 양분을 얻어 자라날 수 있다고, 부패 타도를 외치는 바로 그 사무실들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도자들의 입안에서 자라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패가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고, 카페의 야외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수영장에 가고, 운동을 하고, 아이들을 유아원에 데려다주고, 성관계를 가지리라고는, 부패가 제국주의 체제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_368쪽
“뭘 쓰는데?”
“모르겠어요. 마라카이보에 관한 소설이 될 것 같아요.”
시나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난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알지. 마라카이보의 농부들은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 언제나 그중에 재규어 한 마리가 섞여 있다고 믿어. 어미는 그 재규어가 나머지 고양이들을 잡아먹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따로 떼어놓고 쫓아내지. 재규어는 다르게 자라나는 거야. 해방되어서 말이야. 마라카이보를 세운 사람들이 그랬어. 우린 모두가 재규어의 꿈이 낳은 자식들이야.” _3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