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후 100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되는 그의 반자전적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 주인공인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청년 시인이다. 한때 기세가 높았던 가문은 지금은 몰락했고 말테는 낯선 도시 파리의 하숙방에 기거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시를 쓰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도시이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죽기 위해 몰려드는 암울한 도시이기도 한 파리를 관찰하면서, 말테는 유년 시절의 기억, 내면의 불안과 동요, 신앙, 질병과 가난, 역사와 예술 등 70개가 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릴케는 말테의 시선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탐구한다.
『말테의 수기』는 명확한 기승전결이 있는 사건과 갈등을 빚는 인물들 등장하는 소설이 아니라, 주인공 말테의 사색과 기억, 단편적인 일상과 그에 대한 명상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소설이다. 이 책에서는 독자들이 이 작품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단락을 나누어 소제목을 붙이고, 단어 풀이를 추가했다.
책 속에서
추억만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추억이 우리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표정이 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이제는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뜻밖의 우연한 순간에 시 한 편의 첫 단어가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고 그로부터 시가 시작하는 것이다. (30쪽)
보들레르의 「시체」라는 기이한 시를 너는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맨 마지막 연을 빼고, 그는 조금도 거짓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겼을 경우 그는 어떻게 했을까? 공포 속에서, 오직 혐오스럽게만 보이는 모든 존재를 꿰뚫는 타당한 존재를 보는 것이 그에게 지워진 부담이었다. 선택도 거부도 없었다. 너는 플로베르가 수도사 이야기 『성 쥘리앵의 전설』을 쓴 것을 우연이라고 믿는가. 나병 환자의 침대에 누워서 애인의 잠자리처럼 따스한 마음의 온기로 환자의 몸을 녹여 준다 ― 거기까지 결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결심은 틀림없이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파리에서 환멸에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아무리 추악한 현실일지라도 현실을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모든 꿈을 묻어 버릴 수가 있다는 것에 나 자신이 놀라고 있을 정도다.
아, 이것을 조금이라도 너에게 적어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현실이라는 것을 친구와 나눠 가질 수 있을까. 아니, 현실은 고독 속에 가두어 두지 않으면 안 된다.(81~82쪽)
나는 때때로 천국은 왜 생겼을까, 죽음은 왜 생겼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장 귀중한 것을 천국이나 죽음 곁에 소중하게 놓아 두었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잡다한 일이 많고, 소중한 것을 바쁘기만 한 우리의 신변에 놓아 두기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 버렸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하찮은 일에 매달리며 자신의 귀중한 것을 어느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공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것에 지금은 다만 무서워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181쪽)
누가 뭐래도 나는 성서에 나오는 방탕아의 전설은 어디까지나 남의 사랑을 거절하려고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온 집안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그는 그렇게 자라났다. 어린 마음에 세상이란 그러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사람들의 따뜻한 애정에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졌다.
그러나 소년이 된 날부터 그는 그 습관을 버리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각별히 분명하게 그것을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종일 바깥을 돌아다닌다든가, 정이 든 개도 데리고 다니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가축까지도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고 그랬을 것이다.(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