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대륙의 성공담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의 생존기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저성장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성장률은 둔화되고, 마케팅 비용은 치솟으며,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한때는 좋은 제품을 적절한 가격에 내놓고, 효과적인 유통 채널과 프로모션을 결합하면 성과를 만들 수 있었다. 4P는 오랫동안 마케팅의 기본 공식처럼 작동했다. 본격적인 디지털 전환 이후 한동안 검색 광고와 정교한 타겟팅 기술은 그 성공 공식을 한층 강화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고객의 구매 여정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다. 구글이 ‘혼란한 중간 단계(Messy Middle)’라고 정의한 것처럼, 고객은 끝없는 탐색과 비교 속에서 기업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기술이 이 혼란을 정리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기술이 개입할수록 고객의 선택 과정은 더 보이지 않게 분산된다. 중요한 것은 혼란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다. 그 혼란 속에서 고객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질문은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질문은 더 이상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다. 나 역시 그 한계를 직접 체감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중국 시장을 오랫동안 직접 관찰하고, 수많은 선도기업들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단순한 시장 차이가 아니었다. 기존의 성장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환경이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흔히 14억 인구라는 압도적인 규모의 시장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내가 직접 목도한 중국 시장은 ‘규모의 낙원’이 아니라 ‘생존의 전쟁터’에 가까웠다. 수백 개의 전기차 업체가 난립하고, 알리바바와 텐센트 같은 거대 플랫폼이 유통과 고객 트래픽의 길목을 틀어쥔 공간. 광고비를 더 쓰고 제품 물량을 늘린다고 해서 돌파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규모의 경제’ 개념만으로는 버티기조차 어려운 극단적 경쟁 환경이었다.
그 좁은 바늘구멍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샤오미, 니오, 팝마트와 같은 기업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광고를 쏟아붓는 대신, 기업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소수의 고객에게 집중했다. 다수에게 한 번 판매하는 것보다, 소수의 핵심고객이 스스로 기업의 가치를 전파하게 만드는 편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체득해가고 있었다. 즉, 이들은 단순한 규모 확대보다 고객 관계 기반의 학습 구조를 먼저 구축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들은 이제 기술 자립을 넘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급기야 글로벌 경쟁 질서를 실질적으로 흔들고 있다. 제품, 콘텐츠, 채널, 데이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중국 기업들은 단순히 해외 시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가격과 물량 경쟁 위에 고객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영 방식이 세계 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경쟁은 기업 대 기업의 싸움이 아니다. 생태계 대 생태계, 운영 체계 대 운영 체계의 충돌이다.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기업 경쟁의 기본 조건이 된 시대에도 결국 승패를 가르는 것은 누가 고객과 더 깊은 관계를 구축했는가다. 기술 그 자체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떤 고객 관계의 토대 위에서 작동하는가가 성패를 가른다. 내가 중국에서 목도한 경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이 파느냐”의 싸움이 아니었다. 고객과 얼마나 깊게 연결되고, 그 관계를 빠르게 학습 구조로 전환하느냐의 경쟁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현장을 추적하며 필자가 발견한 것은 하나의 공통된 작동 방식이었다. 제품에서 시작된 고객 관계가 콘텐츠로 확장되고, 채널을 통해 경험으로 반복되며, 데이터로 축적되고, 다시 시장 확장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흐름. 필자는 이 흐름을 ‘핵심고객 주도형 DTC 생태계’라고 정리했다. 이 생태계는 다음의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첫째, 고객 중심성(Customer Centricity)이다. 모든 고객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버리고, 기업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소수의 핵심고객을 정의하고 그들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선택이다.
둘째, 고객 인게이지먼트 가치(Customer Engagement Value)다. 단순한 구매를 넘어 고객의 추천, 영향력, 지식까지 기업의 자산으로 통합해 고객 관계의 가치를 확장하는 관점이다.
셋째, 확장된 DTC 플랫폼(Extended Direct to Customer Platform)이다. 단순한 판매 채널을 넘어 고객이 참여하고 경험하며 데이터를 남기는 온 · 오프라인 통합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본서는 중국 기업의 성공담을 나열한 사례집이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중국 기업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한국 기업이다. 저성장 시대에 기업은 더 많은 고객을 모으는 방식으로는 성장하기 어렵다. 오히려 기업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소수의 핵심고객을 정의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설계하고, 그 관계의 밀도를 측정하는 방식이 새로운 성장의 출발점이 된다.
본서는 이러한 관점을 하나의 일관된 설계도로 정리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핵심고객 주도형 DTC 생태계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이론적 토대를 다룬다. 제2부에서는 이 생태계를 5단계 플라이휠로 분해해 기업이 실제로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전략적 단계로 제시한다. 제3부에서는 이 순환이 글로벌 시장 확장과 경쟁 구도의 재편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저성장 시대에 기업이 다시 성장을 설계할 수 있는 기준점을 제시한다.
이 고민은 시장에서 출발했지만, 성균관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학원에서의 학습과 토론을 통해 한층 더 정제되었다. 특히 졸업보고서를 쓰는 과정에서 본서의 출발점이 된 문제의식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이희상 교수님, 기술 경영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신 조근태 교수님, 신준석 교수님, 김동기 교수님, 조경선 교수님, 그리고 이 책을 출간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형경진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현장의 관찰과 학문적 성찰이 교차하며 다듬어진 이 사유의 결과를, 이제 저성장 시대를 건너야 하는 한국 기업들과 나누고자 한다.
-머리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