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영원을 알아버린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개를 잃어버린 영원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일단 개라고 불러봐.
새 수첩의 첫 페이지에 적은 문장이다. 어디서 본 것인지, 꿈에서 들은 말인지, 누군가 일러줬던 이야기인지, 일러준 이가 있었다면 그이는 심리 상담사였는지, 꿈속의 마녀였는지, 스님이었는지, 점쟁이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일종의 주술이나 부적 같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개라고 불러봐. 개라고 부르면 눈 쌓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으로만 두려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은 어떤 공포와도 다른 방식으로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망들-한 마리 하나 한 개」 부분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에 가깝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필수적이고도 능동적인 본능인 것이다. 반면 베르그송은 ‘기억’이야말로 하나의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원동력, 즉 생명과도 가깝다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다름 아닌 기억을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기억하고 행복을 좇아 망각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기억은 무엇일까. 김리윤은 인간이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이 사랑하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순간의 감정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상대를 끊임없이 호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영원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언가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일 것이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마저 잃어가는 개를, “영원을 알아버린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걷는 법을 잃어버리며 걷는/기억이 몸의 내용인 것처럼 점차 작아지는”(「감정과 징후」) 개를 다시 불러본다. ‘쿵’이라 불리는 개는 “마치 기억으로 빚은 개인 것처럼, 기억이 살점을 덧붙이는 물질처럼, 기억이 이루는 부피처럼 작아지고 있”고 시의 화자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려도, 슬픔이라는 단어를 갖지 못해도 슬픔을 알게 되고야 말듯이”(「감정과 형상」) 끊임없는 감정의 이동을 경험한다. 시집에서 ‘개’는 정서적 교감의 대상이 아닌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는 세계의 구조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형상에 가깝다. 자기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개, 목줄이 헐거워질 정도로 작아지는 개, 반복되는 부름을 듣지 못하는 개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불능 속에서 서로를 소유하는 게 아닌 돌봄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미래를, 눈앞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닌 끊임없이 주어지는 상황을 재설정함으로써 ‘개’는 하나의 상징이 아닌 사건으로 작용한다. 부름이 실패한 후에도 몇 번이고 다시 ‘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지금 눈앞의 물질이 한순간에 사라져 영영 볼 수 없을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혼돈 속에 놓여 있을지라도 바라보고, 부르고, 돌보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 예기치 못한 망각에 휩싸이더라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기억들을 헤집어 다시 한번 불러보겠단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그것은 사라짐을 향해 움직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연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향해 움직인다. 더욱 움직인다”(「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시구는 인간의 운명이 소멸이라면 이를 향해 손을 뻗고 움직이는 것은 사랑의 실천임을 보여준다.
“기억은 표면을 사랑하기 때문에
얼굴은 추상이 되지 못한다”
추상은 꿈꿀 공간을 준다지만
너는 구체적인 창문을 필요로 했다
꿈꿀 공간 말고
손에 잡히는 눈에 보이는
설명할 필요 없이
보여주면 그만인 그런 것
그런 창문을
원했다
시간을 잘게 부수어 눈을 위해 사용하기를
-「깨끗하게 씻은 추상」 부분
“잠에서 깨듯이 장면을 깨뜨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감정의 자연스러운 상태」). 김리윤의 「전망들」 연작은 단어의 뜻 그대로 펼 전(展)과 바랄 망(望),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를 염원하는 마음이 맞닿는다는 점에서 이는 눈앞에 놓인 현실인 동시에 아직 가닿지 않은 미래를 의미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풍경은 물리적인 조건에 기반한 보기의 양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각과 감정, 언어와 형상, 인식과 이미지가 뒤얽혀 발생하는 하나의 관계적 형식이며, 불확실성과의 공존을 감각하고 감당하려는 실천에 가깝다. 전망은 눈앞에 실제로 놓인 장면이면서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감각의 방향을 포함한다”(시인이 쓴 시집 소개 글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풍경을 그림으로써 현실의 이면을 포착하는 김리윤의 시는 영원히 불가해한 사건으로 남을 사랑의 본질은 기다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의 가변적인 속성에 관해 속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이번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의 마지막 구절, “사랑과 함께 미래의 사랑을 향한다”(「가변 테두리의 사랑」)라는 다짐이 지금의 시대에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허물어지는 세계를 해명하기보단 살아 움직이는 물질을 곁에 두고 바라보는 일. 시인에게 시는 세계를 만지고, 말하고, 변형되어 영영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자연을 자신의 눈 안쪽에 남겨두는 일이다.
시인의 ‘보기’는 결코 깨끗하고 무결한 원시적인 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보기와 믿기가 불확실하게 뒤섞여 있는 지대에서 본다. 이때 시인의 제안은 보기와 상상을 대척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상상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다. [······] 적나라한 것, 과도한 가시성으로 스스로 취약함을 갖는 것. 그런 모양새로 세계에 투신하는 일이다. 세계가 희망을 녹여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 텅 빈 상태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지 의식함으로써 거꾸로 희망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추상이다. 세계의 지저분한 이미지들을 날려버리는 표백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라, 사유를 위한 보기 방식으로서의 추상이다.
-김예솔비 발문, 「추위 길들이기」에서
시인의 말
우리가 보는 것들에게도
우리의 눈이 돌이킬 수 없는 마주침일까?
2026년 6월
김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