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아우라는 나의 자유고, 광기다”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태초의 몸부림
조만간 세상 사람들은 너를 두고 사회 부적응자, 신경증 환자, 시대착오자라고 수군거릴 것이야. 심지어 네가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다고 비난하면서, 온갖 악덕의 소유자라는 혐의를 씌우기도 할 테고. 많은 몽유족이 그런 핍박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스스로 퇴화해서,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죽여버리고 있지. 그러나 너는 진정한 몽유족의 후예라는 자의식을 가지고서 네 특별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꿈으로 간직하고 있는 고유하고 핵심적인 그 불씨와 씨앗을 우리는 ‘아우라’라고 부르지. (p. 42)
어느 날 문득 혼자가 아닌 기분에 사로잡힌 ‘나’, ‘몽유라’는 환몽 속으로 들어간다. “남들이 보기에 나름대로 균형을 잘 잡으며 일상을 적절히 꾸려나가는 평범한 인물”(p. 17)인 ‘나’는 다른 한편으로 “온갖 결핍과 과도함에 동시에 시달리”며 “우울증이나 강박증, 편집증과 같은 각종 정신 질환이 결코”(p. 19) 멀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의 뒤틀린 내면은 기행으로 표출되는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남들의 뺨을 때”(p. 26)리는 것이다. 이러한 ‘따귀 때리기’의 이유를 두고 ‘나’는 그 행위야말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착”(p. 28)된다고 말한다. 뺨을 때리고 뺨을 맞는 것은 “뭔가를 극복하고 탐구하려는 욕구의 과정”이라는 것. 운전 중 고속도로에서 목격했던 다리 위의 저승사자를 다시금 낯선 오두막에서 만난 ‘나’는 자신에게 죽음이 선고되었고 환몽이 시작되었으며, 사흘간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세계가 열”(p. 48)리리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저승사자는 ‘나’에게 환몽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고 말하며 그에 대한 실마리로 ‘아우라’를 언급한다. 삽시간에 몽유라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다리 위의 저승사자가 되어 도로를 주행 중이던 세단에 사고를 일으키고, 그 순간 유예된 자신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후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환몽 속에서 ‘몽수로’라는 소설가를 인터뷰하러 간 몽유라는 환몽 속의 환몽으로 빨려 들어가고 공포와 두려움, 허기와 무기력을 느끼며 몽수로의 삶과 가족사를 추적한다. 환몽이 시작될 때 자신이 받은 가족의 이름이 몽수로의 가족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수로가 집필 중인 ‘몽유족 연대기’에서 혼란을 타개할 출구를 마련하리라 결심한다.
우주적 연민에 휩싸인 도주자의 글쓰기
빈 곳에 움트는 궁극의 언어를 찾아서
비로소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찾아다닌 게 무엇인지, 그리고 마침내 찾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우라는 각자에게 고유하면서 모두에게 공통된, 지구상의 인간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순결한 빛이었다. 그동안 그가 지상 곳곳을 발길 닿는 대로 헤매고 다닌 것도 그 순결한 빛을 담고 있는 의미심장하고 궁극적인 하나의 표정 혹은 하나의 눈빛이나 몸짓 혹은 하나의 표식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p. 123)
몽유라가 몽수로의 자전적인 글에서 발견한 아버지 ‘몽나일’, 어머니 ‘몽미나’, 할아버지 ‘몽그루’의 이야기는 신비로운 전설처럼, 탄생과 죽음을 극적으로 묘사하며 장구한 서사로 이어진다. 몽유족의 일원으로서 내면의 유령과 싸우며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나아가는 그들 각각의 고된 여정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찾아야만 하는 생의 의미, 아우라의 발견을 향해 있다. 섬망 속의 말,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벽은 “하나의 거대한 찜통”(p. 164) 같은 세상에서 푹 익어 굳어버린 정신이 아니라 다시금 펄펄 살아 생명을 잉태할 태초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분투에서 비롯한 것으로 읽힌다. “수수께끼 같은 말들, 대개 시작되자마자 곧 끝나서 나중에 기억하기가 쉬운”(pp. 183~84) 말인 ‘아포리즘’이 삼대에 걸쳐 구전되는 이 소설은 비단 인간만이 아닌 생명의 궤적을 의식과 무의식을 얽어 차근차근 써 내려간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순간이 응축”된 아우라, “존재의 머묾과 사라짐을”(p. 227) 비로소 관조하게 하는 계기로 작동하는 그것은 마치 거짓말처럼 공허한 삶의 한가운데 벼락처럼 꽂히는 빛이자 육중한 닻으로서 영혼의 표류를 멈추게 하는 거대한 힘이다. 끝없는 의심 속에서 때로 서로에게 죽음의 활시위를 당기게 하면서도 사랑을 놓지 않게 하는 이러한 동력으로 “‘인간’은 비로소 새롭게 태어”(p. 281)난다. 몽수로의 글에 몰입한 몽유라는 〈카페 아우라〉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한편 수없이 다양한 군상을 인터뷰하며 “사랑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는”(p. 325) 경험을 한다. 그토록 기이한 공간에 자신을 끌어들인 세 인물―수로와 하우, 물주조차 실체를 확인할 길 없이 안개처럼 흩어져버린 어느 순간, 몽유라는 〈아우라 극장〉을 거쳐 〈아우라의 밤〉에 다다른다. “훼손되고 뭉개진 아우라”를 바라보며 “빛의 정수에 대한 기억을 잃”(p. 558)은 상태에서 우주를 실감하고 ‘나’를 새로이 획득하는 장면은 ‘비어 있음’으로 환한, 더는 어두울 구석이 없는 미래를 비춘다. 실상 현실에서 몸과 마음의 문제를 겪는 ‘유성우’라는 이름의 한 사내가 기나긴 환몽 속 몽유라라는 낯선 인격을 통해 치유에 도달하는 과정은 획일적인 세계의 규칙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나’로 화하는 우주적 변신을 그린다. 극단의 개성으로,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영혼의 에너지를 끈기 있게 탐구한 최수철의 소설은 독자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 작가의 말
‘아우라’를 소재이자 주제로 삼아 소설을 써볼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2000년이었다. 연작 형식으로 단편소설을 한 편씩 쓰기 시작하여, 그해에 「아우라 1」을 문예지 『문학사상』에, 다음 해에 「아우라 2」를 『21세기문학』에, 그다음 해에 「아우라 3」을 『한국문학』에 발표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쓰지 못했고, 그래도 언젠가 다시 시작할 생각을 늘 품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듯 20여 년의 긴 시간이 흘렀다. 왜 내가 갑자기 ‘아우라 이야기’를 더는 쓰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래 중단되었던 그 작업을 갑자기 다시 시작하여 마침내 긴 장편소설로 완성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질문들에 답은, 아마도, 이 책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 단순한 추측을 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터인데,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의 내게 ‘아우라’는 의미심장한 떨림이자 도전의 대상이 어서 은근히 나를 억압했던 듯하다.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나이 든 지금의 내게 ‘아우라’는 포옹의 행위이자 희망의 울림이 되어서 이제 그만 나를 풀어준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아우라’는 내 속에 불씨로 살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부제를 “표류하는 자들을 위한 성호”라고 썼다. 이제 나는 모든 사람, 우리 하나하나가 각기 고유한 빛의 존재라고 믿고 있다.
다만, 그 빛은 스스로 뼈저리게 인식할수록 더 환하게 밝혀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자기 내면의 빛을 찾아 나서서 그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기에 이르는 험난하고도 굴곡진 여정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단순히 장편소설이 아니라 ‘아포리즘 장편소설’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처음 구상할 때부터 아포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아포리즘 이야기의 실험’이라는 의미를 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와의 또 한 번의 뜻깊은 인연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돌이켜보며, 나의 ‘아우라’ 첫 단편소설들을 게재해준 문예지들을 포함하여, 그동안 많은 이의 도움이 내게 불씨를 지펴주고 성호를 세워주었음을 새삼스레 절실히 깨닫고 있다.
2026년 6월
최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