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악마 사회
“인정은 모든 악마의 둘도 없는 목표였으며 그리하여 악마들로 하여금 죽기 전에 받을 수 있을까 하고 평생을 오들오들 떨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13쪽)
악마가 인간의 욕망에 맞물려 존재하듯, 소설 속 악마 사회도 인간 사회와 꼭 닮은 모습이다. 얼마나 창의적인 방법으로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따라 등급별로 업적이 나뉘고 그에 따른 포상이 이루어지는 철저한 성과 중심 사회다. 포상은 안락한 ‘집’과 뜻을 이을 ‘후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악마 Z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간의 성과가 미미해, 운 좋게 얻은 보일러 있는 집을 곧 잃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못하는 악마’. 그런 평가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악마 Z는 용기를 내어 가영을 파멸로 이끌 거래를 제안한다.
다만 그 거래에는 악마 Z만의 작은 즐거움이 몰래 끼어 있었다. 바로 그가 거래의 대가로 받은 가영의 스쿠터. 가영이 가진 것 중 가장 재미있어 보여 늘 탐내고 있었지만 사소한 업적이라 비난받을까 봐 외면했던 바로 그 스쿠터를 드디어 차지한 것이다. 모처럼 의욕을 낸 기념으로 스스로에게 허락한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로부터 악마 Z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이 끝말잇기 하듯 주렁주렁 밀려든다. 스쿠터, 스쿠터를 타고 달리며 듣는 음악, 음악처럼 신나게 불어오는 바람, 바람이 흐르는 골목, 골목마다 숨어 있는 맛집들. 그렇게 쌩쌩 인간 사회를 달리는 동안 악마 Z는 문득 궁금해진다. 이토록 많은 즐거움을 가영은 왜 도통 누리지 못했을까? 하고.
· 홀로 남아 소용돌이 치는 마음
“진짜로 혼자가 되었을 때 가영은 마음 놓고 혼잣말에 둘러싸여 지냈다. ‘나는’과 ‘나는’ 사이에 혼자.” (114쪽)
두 번째 이야기 ‘묘지 산책’에서는 가영의 마음속이 펼쳐진다. 한때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했던 가영은 지금 일도 외출도 그만두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집 안에만 머물러 있다. 같은 밴드 멤버의 스캔들에 휘말려 사이버불링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밑바닥을 봐 버린 동료와 다툰 끝에 가영이 조용히 떠나기를 택한 것이다. 가영의 마음에는 사라진 피아노만큼의 구멍이 커다랗게 남아 있다. 사랑했던 음악과 사람에게 상처받고,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로 까무룩 숨어든 지 어느덧 1년.
그동안 가영은 내내 집 안에만 있었지만, 사실 가영의 마음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영의 마음은 커다란 상처를 가운데 두고 아주 먼 과거의 기쁨과 가까운 현재의 슬픔 사이를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다. 버릴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애정이 애증이 되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하는 채로 지켜보며, 이대로 상처에 고인 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간. 그때 가영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처음엔 악마 Z, 다음엔 종현이다. 그 두드림에 응답할 때마다, 가영의 마음속에 고여서 맴돌던 슬픔이 조금씩 바깥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한다.
· 제자리뛰기로 멀리 닿기
“체념은 얼마간의 자유가 되었다. 어차피 난 사랑받지 못하니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껏 다정할 수 있었다.” (139쪽)
소설의 마지막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수상한 능력보다 더 수상한 친화력을 가진 인물 종현의 이야기다. 종현에게는 신기하지만 쓸모없는, 그러나 이 팬데믹 시절에 요긴하게 쓰인 능력이 하나 있다. 바로 ‘열 감지’ 능력. 말 그대로 사람의 체온을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건물 입구마다 놓인 열 감지기 옆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하던 종현은 인간의 평균 체온보다 약간 높은, 그러나 마법으로 열 감지기를 속인 가영(사실은 악마 Z)을 찾아낸다.
사실 종현은 그 능력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악마에게 소원을 빌어 얻었다. 그저 친구를 얻고 싶어서. 아픈 친구를 양호실로 바래다주며 장난친 사소한 기억이 좋아서였다. 그러니까 어릴 때 종현은 ‘친구를 원해요.’라고 말하는 대신 ‘열 감지 능력을 갖고 싶어요.’ 하고 소원을 비는 어린이였고, 지금은 가영에게 ‘계속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공부할 방을 빌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어른이다. 조심스러움에 진심을 에둘러 말하다가 오해받고, 오해를 해명하다 지쳐 체념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 그런 종현에게 오랜만에 간절한 소원이 생겼다. 이 사람을 더 오래 자주 보고 싶다고. 콩콩 제자리뛰기 하는 심장 박동을 이 사람에게만큼은 온전히 전하고 싶다고.
· ‘발문’에서
새삼스럽지만 김화진의 소설이 그동안 해 온 작업은 바로 그러한 소원들에 성실히 응답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남아 식은 마음을 매만지는 사람들을 아주 느리고 섬세한 문장으로 그려 내기. 그들에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볼 시간과 여유를 주기. 어쩌면 김화진은 마치 우리의 작은 악마처럼 숨죽인 채 페이지 위에서 들려오는 그러한 소원들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세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