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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지 마, 죽지 마, 사랑하게 될 거야 007

작가의 말 273
저자 소개
저자 : 권혜영
202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사랑 파먹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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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특히 ‘심야 근무’라는 단어에서 가슴이 철렁했다.
알다시피 나는 심야 근무를 하다가 죽은 사람이지 않은가”

소설의 주인공은 성인 웹툰 속 인물에 빙의된 30대의 직장인 여성. 그녀는 심야 근무 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남성 주인공을 여러 명의 여성이 좋아하고 관계 맺는 이른 바 ‘하렘물’ 웹툰 속 한 여성 ‘이누리’에게 빙의하게 된다. 회사 안에서 온갖 성관계가 벌어지고 모든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을 위해 복무하는 성인 웹툰의 전개를 피해 주인공은 이누리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만화의 장르는 절대 이세계 회귀물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는 윤지훈이 주인공인 세계. 19금 성인 오피스 하렘물이다.
(……)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아. 한 번도 욕심 부린 적 없잖아. 내 삶의 주인공은 나야,라면서 객기 부린 적도 없었다. 단지 이 사회의 평범한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건만. 하렘의 일원만은 싫다. 이곳이 진짜 하렘 지옥이라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탈출해야 한다.
―본문 31~32쪽

한편 이 성인 웹툰, 《심야 근무의 사정》을 그리는 만화가 한소연은 만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만화에 열심이었지만, 첫 작품 이후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결국 생계를 위해 양산형 성인 웹툰 사업에 뛰어들게 된 만화가다. 그는 매일매일 성인 웹툰의 온갖 장면들을 생각하고 인물들이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성관계를 맺는 스토리를 생각하다가 번아웃에 이른다. 간신히 연재를 중단한 그는 일본 만화학교 시절의 친구였던 히카루의 조모상 소식을 듣게 되고, 히카루의 조모가 그에게 남겼다는 유산을 대신 전달해주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각자가 떠맡은 일이 결국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셈이다.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 앞에서는 번번이 어긋나버린다.
히카루 앞으로 남겨진 외할머니의 유품이 있다고 했다. 마감은 무사히 넘겼지만 바로 다음 주가 또 마감이었다. 담당자와 콘티 회의를 앞두고 있어 그는 그것을 받으러 한국에 오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소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자신이 대신 받아 전해주겠다고 했다.
―본문 81쪽

이누리는 남자 주인공을 위해 복무하던 웹툰 속 이누리의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해 나가며 차근차근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회사 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친구 ‘정다운’을 사귀게 되고, 일본으로 ‘덕질 여행’을 떠난다. 인생 최초의 해외 여행길에 오른 누리는 처음 누리는 즐거움에 기뻐하다가, 다운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웹툰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몇백 개의 작품을 읽으며 다운이 찾아낸 웹툰은 바로 《심야 근무의 사정》. 누리는 당장 작가를 찾아가서 웹툰을 중단하라고 요청하고자 한다. 과연 세계가 다른 두 인물은 만날 수 있을까?

나와 정다운은 일본에서의 관광을 중단하고 《심야 근무의 사정》을 그린 작가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다. 밤새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쳤다. 《심야 근무의 사정》은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던 작품이었다. 그러다 작가의 건강 문제로 인해
연재가 멈췄다.
정다운이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도 행동의 자유가 생긴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만화의 연재가 재개된다면 나는 다시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부를 더듬고, 윤지훈을 욕정하게 되고? 그래선 안 됐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나 이 사람 꼭 찾아야 해.”
―본문 221~222쪽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이야기와, 이야기 바깥을 쾌속으로 꿰고 뒤집는
회빙환 시대의 고전이 될 이야기!

회귀, 빙의, 환생을 함께 이르는 ‘회빙환’ 장르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회빙환 세계에서는 지금의 나의 지식과 감정을 가지고 혹은 새로운 캐릭터의 능력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삶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비웃듯 주인공이 빙의된 웹툰의 장르가 ‘내가 주인공이 아닌 오피스 하렘물’임을 주지시킨다. 심야 근무 후 과로로 사망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회사의 고용인으로서의 삶이 주어진다. 다시 주사위를 굴려도 1에서 시작하는 빙의물. 어쩌면 우리 인생에 리셋 버튼이 있더라도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누리의 세계는 사랑이 넘쳐나는 세계다. 이성애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이 모든 관계를 지배하는 세상. 이누리가 윤지훈의 모든 행동과 관계를 ‘관전’하는 캐릭터였다는 점은 사랑과 관계가 전시되는 현실과도 가까이 맞닿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성애와 성적 욕망 중심의 세계를 부수고 일하다 죽지 않는 삶, 발암 물질이 나오는 생활용품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나를 잘 먹이고 입혀서 이 어리둥절한 세계 속에 나를 계속 살려놓는 것. 거창한 목표는 없더라도 나 자신을 착실히 보살피는 이누리의 매일은 온갖 치정이 난무하는 성인 웹툰의 세계 속에서 홀로 곧게 선 사랑처럼 보인다. 한편 이 웹툰의 작가인 한소연은 자신이 사랑하던 그림을 끝끝내 그리지 못하게 된 창작자이다. 그는 모두가 사랑에 빠져 있는 세계를 무수히 창작해 내다가 그만 소진되고 말았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 창작의 기술과 만화 구성의 기술은 창작하고자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기능을 잃고 정지한다. 우리가 삶을 통해 학습해온 사회화 기능이 끝내 마음의 고통과 번아웃 앞에서 정지하듯이. 그러나 그는 진정한 독자였던 히카루의 할머니의 유품 앞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만화가 히카루의 앞에서, 자신이 오래도록 사랑해왔던 ‘창작물’을 마주하게 된다.
“독자가 바늘땀 자국을 찾아다니는 사이에 불가능할 것 같은 장르적 전복을 감쪽같이, 심지어 귀엽게 일으켜버린다”는 소설가 박서련의 말처럼, 이 소설은 웹툰 속 세계와 웹툰 밖 세계를 감쪽같이 접붙이는 소설이다. 하지만 허구를 통해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 문학의 본령이라면, 허구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경유해 현실의 작가를 만나고자 하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문학의 본령에 더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양방향으로의 전복 속에서 소설은 언제나 19세 미만 구독 불가처럼 보이는, 이토록 폭력적이고 위험이 가득한 우리 각자의 삶에서 사랑을 길어 올린다. 바람이 서늘한 추운 날 장어 덮밥을 함께 먹는, 소소하지만 분명한 생의 의지를 그려내는 일. 나와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위한 확실한 사랑을 회복하는 일 같은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권혜영은 이 염세적이고 위기적인 세계에 사랑을 부활시킨다. 얼지 마, 죽지 마, 사랑으로 부활하게 될 거야, 하며.

저자의 말

그렇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아주 신중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나한테 벌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일에 지쳐 있고, 돈에 시달리고, 좋아하는 것에 과몰입하고, 외롭고, 사랑에 대해 잘 모르고, 이상한 욕망을 품게 되더라도 끝끝내 어떤 핵심 하나를 남겨두어야 나는 살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자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오래도록 좋아할 이야기, 편하게 돌아갈 수 있는 장소, 그곳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왔어?” 하고 말해주는 누군가.

추천사

그러네? 어떤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사실 창작이네? 행복하길 기원했든 불행하라 저주했든, 아직 지면에 옮겨지지 않았을 뿐인 2차 창작이었네. 그러니까 이건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현재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그 사람이 가야 할 미래를 그린 무궁한 상상의 이야기. 남성향 성인 웹툰 캐릭터에 빙의한 인물과 그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인물의 눈이 마주치는, 기이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 권혜영은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이야기와, 이야기 바깥을 쾌속으로 꿰고 뒤집는다. 독자가 바늘땀 자국을 찾아다니는 사이에 불가능할 것 같은 장르적 전복을 감쪽같이, 심지어 귀엽게 일으켜 버린다. 전개와 결말을 알고서도 기어이 다시 찾게 되는 것이 명작의 조건이라면, 이 소설은 회빙환 시대의 고전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_박서련(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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