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이번 여름에는 나라는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열매가 달렸다.”
각자의 열기를 건너온 작가들이 건네는 한여름의 조각들
여름이 짙어질수록 세상은 맹렬한 열기를 뿜어낸다. 쏟아지는 매미 울음소리와 눈부신 초록의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찬란한 젊음과 해방감을 떠올린다. 하지만 각자의 방문을 열고 나선 어른의 여름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세상이 뜨거워질수록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더 무거워지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묵묵히 출퇴근길을 견뎌야 하는 현실의 눅눅함이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계절 일기’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인 『어른의 여름방학에는 숙제가 없다』는 바로 그 여름의 진짜 얼굴을 낱낱이 닦아 낸 기록이다. 직업도, 나이도, 사는 곳도 다른 저자들은 ‘일기’라는 정직한 형식을 빌려 각자의 여름을 통과한다. 온몸으로 덥고 습한 계절을 마주하며 남긴 이 기록들은 막연한 휴양지의 환상 대신, 땀내 나고 끈적하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의 질감을 품고 있다.
여름을 견디고, 사랑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어른의 삶을 통과하는 가장 솔직하고 뜨거운 여름의 무늬
‘방학’과 ‘숙제’는 어른이 되며 그 의미가 달라지는 단어다. 어린 시절 우리의 여름에는 언제나 긴 방학이 있었고, 억지로라도 채워야 할 밀린 일기와 ‘탐구 생활’이라는 숙제가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누군가가 내주는 숙제가 없어도 각자의 삶이라는 묵직한 과제를 매일 홀로 풀어 가야 한다. 저자들이 하루하루 쌓아 올린 이 여름의 정경은 매끈한 휴가지의 사진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젖어 버린 운동화, 뙤약볕 아래서 무거운 흙과 돌을 만지는 정원사의 노동, 만원 버스에서 느끼는 불쾌감, 그리고 에어컨 바람 아래서 불덩이 같은 몸을 식히는 잠깐의 쉼 같은 것들이다. 저자들은 이토록 덥고 지치는 일상에서도 스스로에게 방학 같은 다정한 휴식을 허락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에게는 산과 바다로 떠나는 계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여느 때처럼 땀 흘리며 치열하게 살아 내야 하는 현장인 여름. 저자들은 불볕 아래서 일하는 누군가의 굽은 등을 보며 생의 무게를 감각하고,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야근하며 선풍기 소리에 위안을 얻는 여름밤을 적는다.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집에서 수박을 썰어 주는 부모님의 마른 손을 마주하는 마음, 장마철 옥상에서 비를 피하는 길고양이에게 겹치는 연민, 퇴근 후 들이켜는 차가운 맥주 한 캔으로 돌아보는 하루는 우리들 삶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어서 더욱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 해 쉰 땅에서 벼도 더 잘 자란대. 어른도 멋진 여름방학이 필요해.”
스스로에게 다정한 쉼을 허락하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계절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핵심을 꿰뚫는다. 어른의 삶에는 정해진 방학도, 누군가 검사해 줄 숙제도 없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삶의 여백을 만들고 자신만의 정답 없는 답안지를 써 내려갈 특권이 있다. 뙤약볕 속에서도 기어코 그늘을 찾아내고, 장마철의 습기 속에서도 뽀송하게 마른 수건 한 장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면, 억지로 채워야 할 숙제가 사라진 어른의 여름이야말로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가장 자유롭고도 너그러운 계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의 여름방학에는 숙제가 없다』는 낭만으로 포장하기엔 몹시도 끈적하고 치열했던 우리들의 여름을 생생히 담아 낸다. 화려한 휴양지의 풍경은 없지만, 타인의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어느새 눅눅했던 내 삶의 한구석이 보송보송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남몰래 흘린 땀방울을 위로받으며, 자신의 여름을 온전히 끌어안게 된다. 억지로 채워야 할 정답이나 누군가의 검사가 필요 없는 어른의 방학. 각자의 방식으로 앓고, 땀 흘리고, 사랑하며 통과한 이 여름의 기록이 시원한 보리차 한 잔같이 여러분의 마음에 스미기를 바란다.
책 속으로
마시지 않은 물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낯선 것이 된다. 처음에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그냥 남겨진 액체가 된다. 이름은 같지만, 용도가 바뀌는 것들. 당신이 남기고 간 것들도 비슷했다. 있을 때보다, 없어진 뒤에 더 정확해지는 부분들.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정리하지 못했다.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정현우, 「빛의 편린」에서
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저렇게 말간 무지개를 본 적이 있던가. 그래, 여름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거였지. 중요하다고 여긴 일들이 모두 가벼워지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들이 전부 괜찮아지는 계절, 여름.
-구선아, 「소멸하지 않는 무지개」에서
열매가 열리는 시기를 뜻하는 ‘열음’에서 여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을 본 적이 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는 내가 여름을 더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견디기 힘든 뜨거움과 하늘을 비울 듯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열리는 각종 열매가 진짜 여름의 상징이 아닐까. 달콤하게 익어 가는 과일, 속을 가득 채워 가는 뿌리채소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잎채소들……. 이번 여름에는 나라는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열매가 달렸다.
-장샛별, 「어른의 여름방학에는 숙제가 없다」에서
선풍기 앞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처럼 여름은 흘러내리기에 바빴고 끝물 복숭아가 들어갈 무렵 풋것의 비릿한 얼굴을 하고서 아오리가 나왔다. 흘러내리는 무른 얼굴로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간 사람처럼 오늘은 아오리가 푸르게 익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꼭지가 헐거워지고 지극함에 이르는 시간. 한창때를 지나 씨앗을 거둬들이는 일. 한물간 것이 아니라, 첫물을 지나 견뎌 온 사랑이 그 안에 있다.
-하기정, 「끝물의 얼굴」에서
“한 해 쉰 땅에서 벼도 더 잘 자란대. 어른도 멋진 여름방학이 필요해.” 그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일기를 쓰는 지금도 어쩐지 울컥한다. 반년이 되도록 내가 스스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작은엄마는 설날 아침에 이미 봉투 뒤에 적어 두었다. 어른의 여름방학이라니. 나의 이 시간을 이보다 더 멋진 말로 치환할 수 있을까.
-홍지연, 「어른의 여름방학은 밀린 방 청소부터」에서
그럴까, 이 정도를 여름이라고 부를까요. 완전히 망하지도 완전히 시작되지도 않은 중간쯤의 온도. 나는 이름 붙이고 싶어집니다. 여름, 그래야 지나간 다음에라도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페이건드라카, 「연하장(挻夏狀)」에서
아아, 엉망진창의 여름. 버스가 빠르게 달리면 창밖의 풍경이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혼잡하게 뒤섞이는 여름. 사람들의 미니 선풍기가 내는 진동이 모터 드릴의 소리처럼 변하는 여름. 그제야 왜인지, 구태여 사랑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이정, 「플립 오버」에서
열대야가 십오일이 넘게 이어지던 날 저녁 우린 한강을 걸었다. 여름 내내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너의 목뒤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강물은 낮았고 우린 깊었다. 내 안에서 너를 쉼 없이 퍼내면 그리움도 바닥이 보일까. 가뭄 끝의 우물처럼 우리가 마르는 날이 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우리의 시간은 여름 뙤약볕처럼 빈틈이 없어서 숨을 쉬지 못했다.
-김동연, 「14시간 35분」에서
혼자가 되는 건 두렵지 않아. 더 이상 너와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렵지. 사랑을 죽음의 공포로 알게 되다니 너무 무거워 어디에도 적을 수 없었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라 한 톨의 비난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이서, 「마지막 인사는 역시 사랑해로 하자」에서
여름 산책을 할 때면 초록으로 가득한 나무 앞에 멈춰서 발걸음을 미세하게 조정해 본다. 위치를 잘 맞추면 가지 사이로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빛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빈틈만으로 눈을 아리게 만드는 빛을 바라보며 다른 내일을 그려 본다.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빈틈은 하루를 비추고 통과하는 문장으로 채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윤주환, 「볕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