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출판사 서평
“세계사적으로는 냉전이 붕괴됐다고 했던 1990년대, 아직 냉전의 분단 구조 속에 있던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적 기억을 둘러싸고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전후(戰後) 50년’을 전후해 일본에서는? 역사를 둘러싼 논의가 들끓어 올랐고, 또 정치체제로서는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후 ‘과거청산’에 관한 제반 사업들이 급속도로 전개됐다. 그런 과거에 대한 논의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일이었다. 그들이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에 대한 정부...
“세계사적으로는 냉전이 붕괴됐다고 했던 1990년대, 아직 냉전의 분단 구조 속에 있던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적 기억을 둘러싸고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전후(戰後) 50년’을 전후해 일본에서는 역사를 둘러싼 논의가 들끓어 올랐고, 또 정치체제로서는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후 ‘과거청산’에 관한 제반 사업들이 급속도로 전개됐다. 그런 과거에 대한 논의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일이었다. 그들이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에 대한 정부의 자세나 역사 교과서 같은 공식적인 역사의 영역도 흔들렸다. ‘새역모’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단체들도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반동적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기억의 항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국경을 넘어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국경을 넘은 대화를 요청했으며, 그 속에서 역사학이라는 제도를 재검토할 필요를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한 걸음 더 그 ‘밖’으로 나아가 ‘기억의 장’이라는 주제를 안겨주었다. 기존의 역사서술을 둘러싼 제도의 틀 밖에서 역사와 마주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기억의 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 것이다. 더 이상 과거에 대한 논의를 역사학의 문법 속에 모두 맡길 수 없다는 현실의 절박한 필요에 따라 ‘기억의 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 서문에서
동아시아 관점에서 풀어본 ‘기억의 장’ 프로젝트
『동아시아 기억의 장』은 피에르 노라(Pierre Nora)의 ‘기억의 장(lieux de m?moire)’ 프로젝트를 ‘동아시아 관점’에서 풀어본 것이다. ‘프랑스’의 집합적 기억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던 노라의 ‘기억의 장’ 프로젝트에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총 8년에 걸쳐 120명에 달하는 역사가, 문학인, 사상가 들이 참여했으며, 그 결과 전 7권 총 135편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시리즈가 발간됐다. ‘역사’ 대신 ‘기억’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업은 역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 책은 프랑스를 넘어 여러 나라에 번역됐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러시아, 룩셈부르크 등에서도 같은 기획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프랑스나 독일처럼 ‘일본의 기억의 장’이나 ‘한국의 기억의 장’, ‘중국의 기억의 장’ 등 소박한 국가 단위의 기억 논의를 진행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우리의 역사는 중화 제국, 일본의 제국주의와의 전쟁, 냉전, 한국전쟁, 그러한 역사가 만들어낸 디아스포라(diaspora), 오늘날의 글로벌화 등 ‘일본’이나 ‘한국’이라는 단위를 국민사적으로 나누기에는 너무나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과거 다른 국가들에서 행해진 ‘기억의 장’ 프로젝트처럼 일 국가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과 한반도에 축을 둠으로써 보이는 ‘동아시아’를 그려냈다. 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넘나듦의 문제, 제국과 식민지의 문제 등에 대해 고민하면서 역사를 ‘기억’의 차원에서 살펴본 작업이다.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동아시아에서의 역사 인식에 대한 논쟁을 벌였던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 포럼’ 구성원들이 2006년부터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동아시아 기억의 장’에 대한 논의를 거듭했고, 이에 대한 결과로 2011년 일본에서 『東アジアの記憶の場』을 출간했다. 이번에 도서출판 삼인에서 나온『동아시아 기억의 장』은 이 책을 단순한 번역한 것을 넘어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한국어판이면서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이 구축하는 ‘역사’와 살려진 ‘기억’들 ‘사이’
최근 20년 사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법에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다. 한마디로 ‘기억’, ‘상기’, ‘망각’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기억’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해 많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촉구된 방법론적 반성, 즉 ‘기억론적 전회(memologic turn)’는 사고의 준거점을 역사에서 기억으로 바꾼다. 사각지대에 있던 것이 가시화되면서 역사적인 범주가 확대됐을 뿐 아니라, 이제까지 역사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했는지까지 비판적으로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기억의 장’ 프로젝트도 여기에 영향을 받은 여러 지적인 논의에 속한다.
특히 ‘기억의 장’은 역사학이 구축하는 ‘역사’와 살려진 ‘기억’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기억의 장’에 착목했다는 데 그 방법론적 혁명성이 있다. 애초에 ‘기억의 장’은 역사학에 대한 준엄한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노라는 근대적 장치로서의 역사학이란 그것이 참칭하는 것과 달리 ‘기억’의 파괴자라고 말한다. 정통 역사서술은 과거의 ‘1차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확정해간다. 반면 통설, 속설, 억설, 풍설, 전승, 신화, 민화, 소문, 대중적인 역사소설 등 2차 사료는 쉽게 무시된다. 노라는 여기에 반기를 내걸었다. 즉 ‘사실이 어떠했는가’보다는 ‘어떻게 인식되고 기억됐는가’를 일차적인 논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내셔널 히스토리의 한계를 넘어서
‘동아시아 기억의 장’ 또한 이러한 노라의 정신을 이어받는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단순히 노라의 ‘기억의 장’을 동아시아로 확대하려는 작업이 아니다. 노라가 프랑스라는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기억의 장’을 논하면서 프랑스 식민지를 둘러싼 요소는 대부분 ‘기억의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내셔널 히스토리를 비판했던 프로젝트가 오히려 또 다른 국가적인 역사서술이 되어버린 셈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노라의 한계를 확실히 인식한 후 그 한계점을 동아시아 ‘기억의 장’에 대한 모색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동아시아 기억의 장’을 “일본에서는…”,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단순히 비교사적으로 병렬한다면, 그것은 그저 여러 국민의 ‘기억의 장’을 긁어모아 나열해놓은 데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관계성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상기되어온 것뿐만 아니라 망각되어온 것도 동시에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집단 사이의 어떤 관계에 유래하는지도 주목하게 된다. 기억은 상기되는 것에서 제외되는 무수한 것들이 있기에 성립한다. 이 책에서 국민적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해부하는 일은 곧 어떻게 다른 것이 망각됐는가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이루어진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동아시아 기억의 장’을 국민국가를 단위로 대칭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 인종주의, 계급투쟁, 젠더 분할이라는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도 포함된 연쇄나 분열을 역사화해가면서 해명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혹은 ‘한국에서는’이라고 단순히 구분 지을 수 없는 장소, 또는 복수의 ‘국민적’ 기억의 장 사이에 존재하는 틈과 같은 ‘비(非)장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야기, 어둠에 놓인 것, 그러한 기억의 국민경제로부터 벗어난 경험을 사고하지 않고는 ‘동아시아 기억의 장’을 논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위치’에서 논의할 때 ‘동아시아 기억의 장’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미완성인 채로 열려 있는 ‘동아시아 기억의 장’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다룬 ‘기억의 장소’는 무엇일까. 우선 아시아의 공통적인 요소는 바로 한문으로 쓰인 고전이다. 또한 근대 주권국가의 경계선이 그어지기 훨씬 이전, 고대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역사적 변동 또한 현대인들에게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고전고대의 공간 가운데 이 책에서 다룬 것은 무(武)의 상징인 ‘관우’와 문(文)의 상징인 ‘공자’, 그리고 고대 한일 관계에 관한 서술에서 중요한 ‘삼한정벌(三韓征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