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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재고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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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투명해서 너무나 투명해서
형이 아홉살 내게 말씀해주신다
나의 신은 틀렸다
부활절 달걀
배심원의 시
맨 인 더 박스
현과 혁
돌과 실
염소가 끌고 온 언덕
페니 맨
세상 모든 벽돌의 사랑스러운 침묵
녹색 광선

제2부캘리포니아산 오렌지 한알
코드 블루
시계태엽 오렌지
1969년 여름, 그 엉망진창의 여름으로부터
유리새
2002916
어둠 속의 대화
붕대의 아들들
바그다드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보이스카우트
나는 그녀의 시로 소비에트식 미니어처를 만들 줄 안다

제3부길고 긴, 기계들의 예배가 끝났습니다
죽은 기계들의 사회
붕대의 끝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스팸에 관한 아주 사소한 네가지 증언메일
영화와 건축
불가능에 가까운 촛대

제4부부활을 연습하는 아이
70억분의 1의 사나이
아임 낫 데어
부작용의 공동체
흑
그만 죽어 김일성
슈뢰딩거의 돼지
유도 소년의 올바름
쿠데타는 하품을 한다
테트리스

제5부녹색 광선의 가장자리에서
짐승
도라무깡

시인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조인호
2006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방독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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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신은 한없이 삼각형에 가까우셨다”
전위적으로 빚어낸 뼈아픈 농담과 불온한 상상력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을 관통하는 거대한 페르소나는 ‘고아’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존재, 아무도 이름 불러주지 않는 존재, 그러나 기어이 자기만의 농담과 기도와 신화를 만들어내는 존재를 전면에 세운다. 시집의 화자들은 “돼지가 널 먹을 때는 아무도 네 이름을 부르며 찾지 않을 때다”(「형이 아홉살 내게 말씀해주신다」)라는 섬뜩한 진술 속에서 세계의 냉혹함을 배운다. 하지만 조인호는 이 두려움을 감상적인 상처 고백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웃기고도 섬뜩한 블랙코미디로 바꾸어놓는다.
「부활절 달걀」에서 고아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달걀에 그리고 서툰 글씨로 기도문을 적는다. 그러나 이 달걀은 곧 신의 얼굴이 되고, 우주비행사의 성물이 되고, 장례의 방식이 되고, 마침내 “한 작은 인간”이 웅크린 탄생의 이미지로 변신한다. 거룩함과 불경함, 웃음과 공포가 한몸처럼 뒤엉키는 이 시에서 독자는 조인호 특유의 과감한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신은 한없이 삼각형에 가까우셨다”(「나의 신은 틀렸다」), “신은 막대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테트리스」) 같은 진술 역시 결코 신성모독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구원의 자리를 더이상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끝내 만들어낸 가장 불경하고도 절박한 방식의 기도다.
이렇듯 조인호의 시는 언제나 농담처럼 출발해 재난의 한복판에 도착한다. 우스꽝스러운 장면 뒤에는 폭력이 있고, 황당한 설정 끝에는 깊은 상처가 있으며, 그 과감한 상상력의 바닥에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놓여 있다. 시인은 김일성 사망 소식과 신문 배달 소년의 기억을 겹쳐놓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와 가난한 유년의 욕망을 절묘하게 비틀고(「그만 죽어 김일성」), 이태원 핼러윈의 밤, 종교와 혐오와 죄의식이 뒤엉키는 장면을 숨 가쁘게 통과한다(「슈뢰딩거의 돼지」). ‘도덕주의’라는 안전핀마저 뽑아버린 이 용감한 시들은 때로는 독자의 마음을 서걱이게 하면서도 끝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아무리 길어도 길지 않은 시들
역사극, 무성영화, 스탠드업 코미디가 한꺼번에 펼쳐지는 세계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의 또다른 즐거움은 장면마다 새롭게 열리는 거대한 스케일에 있다. 용광로 속으로 뛰어든 한 노동자의 죽음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녹슨 철로의 이미지로 이어진다(「맨 인 더 박스」). 그리고 독일 무성영화의 세계를 불러와 흑백의 도시와 로봇, 마천루와 자막을 통과하게도 한다(「영화와 건축」). 전쟁과 농담을 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바그다드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 전쟁터로 징병된 안드로이드와 그를 기다리는 존재의 편지를 통해 인간과 기계, 사랑과 전쟁 사이의 경계를 뒤흔든다(「어릿광대를 보내주오」).
시인은 대중문화와 세계사, 과학과 종교, 영화와 정치적 사건을 시의 재료로 종횡무진 끌어온다. 그런데 이 낯선 재료들은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는다. 고아라는 근원적 감각, 버려진 존재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본다는 일관된 축이 300여면의 분량을 단단하게 꿰뚫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독자는 매번 전혀 다른 장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어느 순간 그 모든 문이 하나의 거대한 방으로 이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곳은 조인호만이 열어보일 수 있는 불온하고 매혹적인 방이다.
대미를 장식하는 장시 「도라무깡」은 이 시집의 역사적 상상력이 도달한 정점이다. 일제강점기 731부대의 생체 실험에서 태어난 존재는 만주 벌판의 드럼통 안에 버려져 7년을 견딘다. “나는 통각이 없기에/조금도/고통스럽지 않았다”라는 화자의 고백은 너무나 참혹해서 오히려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었던 폭력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단순한 역사 고발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라무깡(드럼통)’ 속에서 살아남은 괴물의 목소리를 통해 시인은 제국의 광기와 인간의 공포, 뭇 생명들의 악몽을 묵시록적 활극처럼 펼쳐 보인다. 조인호의 시에서 괴물은 역사가 낳고 버린 또 하나의 고아이며, 독자는 그 괴물의 시선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검은 우물을 들여다보게 된다.

“투명해져서 너무나 투명해서”
깊은 슬픔 끝에 비로소 떠오르는 기묘하고 찬란한 몽환의 서정

이토록 거칠고 대담하게 나아가지만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은 결코 차갑게만 남지 않는다. 표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녹색 광선」은 조인호의 세계가 지닌 서정적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보여준다. 밤바다로 걸어 들어간 고아원 아이들은 “보름달물해파리처럼/투명해”지고, 너무나 투명해져 “서로를 통과해/지나다닐 수도 있”게 된다. 사라질 듯 희미한 존재들이 서로의 몸을 지나고, 하나가 둘이 되거나 둘이 하나가 되는 이 장면은 사라질 뻔한 존재들이 유령처럼 서로를 붙드는 슬픈 세례의 순간이다.
그 바다에서 화자는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을 경험한다. 물에 뜬다는 것은 고통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혼자 가라앉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는 일, 버려진 존재들이 서로를 통과하며 가까스로 부력을 얻는 일에 가깝다. “일생에 단 한번,/깨져야만/날 수 있는//유리새”(「유리새」)의 운명처럼, 조인호의 시는 깨지고 훼손된 자리에서 비로소 날아오르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인의 말’에서 조인호는 병실의 어머니가 건넨 한마디를 적는다. “인호야, 하나님은/고아와 과부를 축복하신다는데,/나는 둘 다 해당되니/축복이 너무 많다.” 시인은 이 농담 한마디가 “다시, 시를 쓰게 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 전체를 여는 열쇠처럼 읽힌다. 이 시집에서 농담은 현실을 가볍게 넘기기 위한 도피가 아니다. 무너진 뒤에도 다시 말하기 위해, 상처 입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가까스로 발명한 생존의 형식이다.
15년을 기다려 도착한 조인호의 두번째 시집은 한국시의 한복판에 아주 낯설고 강렬한 파문을 일으킨다. 기괴한데 아름답고, 잔혹한데 웃기며, 어두운데 묘하게 계속 읽고 싶은 이 시집은 오래 기다린 독자에게는 반가운 귀환으로,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는 잊기 어려운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다음 기다림은 15년보단 짧기를, 그것뿐이다”라는 신형철의 애정 어린 당부처럼, 독자들 역시 이 매혹적인 블랙코미디의 바다에 기꺼이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 물을 무서워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물 위에 뜨는 시간.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이제 우리 앞에 도착했다.

책 속에서

교회 종이 세번 치면
고아원 아이들은
모두 저녁 예배에 간다.

나는 교회에 가지 않고
형과 함께
돼지우리 앞에 있다.

발뒤꿈치 들고
돼지우리 안을 들여다본다.

이제 아프지 않다. 형.

돼지우리 안에 돼지가 없다
―「형이 아홉 살 내게 말씀해주신다」 부분

이처럼 진실한 기도는 문고리보다는 달걀과 같은 것이어서
깨고 나올 순 없다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기도 시간에 몰래 눈을 떴을 때
아,
거룩하신 그분과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나만 빼고
모두 눈을 부릅뜬 채
우적우적
달걀을 까먹고 계셨다.
―「부활절 달걀」 부분

그 바다에서
아이들이 나올 때는
몸은 투명해져 있어서
너무나
투명해져서

형들에게는 검은 미역이
누나들에게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동생들에게는 불가사리가
담겨 나오고

그 바다에서
나는 세례를 받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겨,
올려다본 수면 위로
일렁이는 고아들의 얼굴들
―「녹색 광선」 부분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처맞고 나서야 알았다
붕대란 이렇게 따뜻한 것이로구나, 양 한 백마리쯤 구덩이에 고꾸라져 구덩이를 하얗게 채우듯 상처를 덮는 이 붕대란 것이 천사의 입맞춤이라는 것을,

청년은 국민참여재판정에서 붕대에 관해 역설했다
―「붕대의 아들들」 부분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훌륭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서서 죽었으니까.

그날, 그가 했던 마지막 농담을 기억한다. 아들아, 서 있기가 힘들구나……

그때 나는 보았다.
검은 병실 천장 위로
거대한 자궁이 열리고,

그 아래 갓 태어난 가젤 새끼처럼 아버지는 기어이 서 있고자 했음을.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농담을 이해할 줄 모르는 젊은 얼간이였다.
―「바그다드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 부분

전쟁이 길어지면서, 나의 반려 안드로이드,
당신마저 징병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나의 사랑하는 전기 양, 당신이 없으니
제 영혼은 털 깎인 양처럼 외롭고 추워요.
이제 나의 베개는 텅 비었고,
아무도 내 베개를 따뜻하게 채워주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부분

나는 쫓는다 누구를? 돼지를! 쫓다가 양꼬치집을 지나치는데 사내 몇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쇠꼬챙이에 꽂힌 채 회전하던 양 한마리 “어이구, 인간아, 돼지는 저쪽으로 갔지 말입니다!” 고자질하며 내게 하는 말, 언제부터 조선 놈들이 양꼬치를 먹었다고,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다, 슬프다, 사실 원래 나는 양이 아니었다,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새끼 양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쫓는다 누구를? 돼지를! 사실 말하자면 아까 거리에서 보았던, 김정은 분장을 한 그 녀석이 꽤 맘에 들었다 핼러윈데이 오늘 같은 밤 이태원 한복판에 핵폭탄이 떨어지면, 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빨간 버튼 한번 꾹, 누르면 오늘 같은 밤이 좋아라 한다고 김정은에게 은근슬쩍 쪽지 한장 건네주고 싶었지만
―「슈뢰딩거의 돼지」 부분

세족례(洗足禮) 도중 아이가 신부에게 말했다 어젯밤, 신을 만났어요 신부는 이 성스러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야에 물을 부었다

그래, 신이 뭐라고 말씀하시던?

대야에 발을 담그고 아이가 대답했다 아무 말씀 없었어요, 그냥 막대기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테트리스」 부분

쇼와 20년,
천황의 목소리가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던 날,
기무라 교수는 조선총독부 지하 연구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날의 하늘은 순도 높은 에메랄드빛이었다.
팔월의 매미가 울었다.
나는 그날 죽은 기무라 교수―
아니, 육군본부 소속 대좌의
머리부터
먹어치운 날이기도 했다.
―「도라무깡」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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