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뮤지컬의 흥행으로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 실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는 그녀의 조카며느리가 되는 치타였지만, 엘리자베트는 화려했던 제국의 최후의 광휘와도 같은 존재감을 보이며 오스트리아 최후의 황후라는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과연 그녀는 보수적인 황궁에 갇혀 재능과 꿈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비극적 가족사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한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된 비운의 황후인가, 저물어가는 제국의 황혼에 서서 역사와 시대정신을 통찰하지 못하고 외모에 대한 집착과 자기 연민에 빠져 이기적으로만 살았던 구시대의 인물인가.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엘리자베트의 일대기가 김장수 교수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고 승마를 좋아하던 소녀는 그 발랄한 아름다움에 매혹된 젊은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여 열일곱의 나이에 대제국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다. 그러나 황후로서의 생활은 동화나 영화와는 달랐다.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위기, 황제인 아들의 부부 생활까지 좌지우지하려는 시어머니와의 갈등, 어려서 죽은 딸, 외아들의 자살. 결국 그녀는 끊임없는 방랑으로 도피한 끝에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살아 있을 때의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밖으로만 나돌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궁 사람들 역시 황후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그녀를 은근히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오스트리아에서는 많은 사람이 아름다웠던 황후 엘리자베트의 비극적인 삶을 기억하며 그녀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녀의 초상화가 상품으로 제작되어 판매되고, 그녀의 삶과 관련된 장소가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끈다. 죽은 뒤에야 오스트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황후가 된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책 속에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한 접견실에서 황제, 조피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빌헬미네 대공비, 루도비카 빌헬미네 공작 부인, 그리고 18세의 헬레네가 만났다. 루도비카 빌헬미네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신부를 얻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헬레네가 황제의 신부로 결정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가정교사와 함께 접견실 옆의 별도의 방에서 따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결정적 순간에 활발한 딸 때문에 우발적인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공작 부인이 그렇게 조치한 것이었다.
결혼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오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다소 불안해했고 이것을 감지한 조피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빌헬미네 대공비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신의 작은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긴장하고 있는 공작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때 헬레네는 다소 경직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옆방에 있던 여동생을 불렀다. 엘리자베트는 흰색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풍성하고 비단결 같은 밤색 머리카락이 날씬한 몸매를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는 들장미 다발을 들었고, 가정교사와 말다툼을 하느라 얼굴이 다소 불그레해진 상태였다. 엘리자베트는 초상화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본 적이 있고 전날에도 인사를 했기 때문에, 당황한 기색 없이 다가가 머리를 숙였다.(58~59쪽)
어린 딸의 눈을 감긴 엘리자베트의 분노와 죄책감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무렵 황후의 심적 상태는 측근들의 일기장과 서신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황후는 무력증과 식욕 부진, 은둔 등의 다양한 증세를 보였지만 이러한 것들은 이름을 댈 만한 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궁 의사들이나 궁정인들은 엄살로 간주했다. 다만 일부 의사들은 과도한 쇼크에 따른 장애 현상이라는 판정을 하면서 이를 ‘엘리자베트 신화’로 변용시켰다.(99쪽)
엘리자베트는 경호원 없이 여행하면서 가명을 사용하며 소수의 궁녀만을 동반하는 무리수도 두었다. 이때부터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모로코, 이집트, 알제리 같은 나라들도 방문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 엘리자베트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유발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암살당하는 순간에도 엘리자베트는 경호원은커녕 수행 궁녀 한 명과 낭독자 한 명만을 대동하고 있었다.(210~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