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타임라인 속으로,
밴드 음악이 소환하는 우리들의 찬란한 기억
하나의 음악 장르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장르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쳐내는 새로운 에세이 시리즈 ‘임의 재생’. 시리즈의 첫 번째 테마는 우리를 뜨거웠던 청춘의 한복판으로 데려다줄 밴드 음악의 세계다. 시리즈의 서막을 알리는 이 책은 전체 80개의 풍성한 트랙 리스트 중 무려 절반 이상을 밴드 사운드로 채워 넣었으며, 함께 수록된 플레이리스트는 날것 그대로의 전율과 록 스피릿의 짙은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기억 속 전설들이 하나둘 무대 위로 걸어 나온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고도 아릿해지는 라디오헤드(Radiohead)부터 찬란한 청춘의 송가이자 세대를 초월해 언제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던 오아시스(Oasis)의 거대한 떼창 그리고 심장을 타격하는 강렬한 기타 리프와 야성적인 에너지로 시대를 다스렸던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까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 방 안의 공기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밤의 습도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안내하는 트랙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단순한 음악 에세이가 아니라 각자의 인생에 새겨진 찬란했던 타임라인을 따라 걷는 여행임을 깨닫게 된다.
이어폰을 깊숙이 꽂고 볼륨을 높이는 순간 희미해졌던 청춘의 로망과 뜨거운 낭만이 다시 한번 당신의 일상 위로 세차게 연주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절 우리를 구원하고 뜨겁게 불태웠던 위대한 밴드들의 음악을 다시 ‘임의 재생’해 볼 시간이다.
음악이라는 가장 완벽한 기억의 방부제,
다 잊은 줄 알았던 그날의 공기 속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길을 걷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짧은 전주 한 소절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면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라디오나 카페 스피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옛 멜로디 하나가,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과거의 어느 한낮으로 우리를 툭 데려다 놓는 그런 신비로운 순간 말이다.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다. 특별할 것 없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 페이지였는데도 음악이라는 방부제가 더해지는 순간 그날의 공기, 입안을 맴돌던 맛, 코끝을 스치던 냄새와 기분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 온몸의 감각을 깨우곤 한다.
이 책은 그런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던 찰나를 기준으로 장이 나누어져 있고, 각 장에 소개된 곡들은 생생한 기억을 감춘 채 독자를 맞이한다. 이 숨겨진 기억을 열어젖히고 즐기는 방식만큼은 온전히 읽는 이의 자유다. 작가가 들려주는 에피소드와 음악을 동시에 나란히 감상해도 좋고, 마음에 드는 음악이 있다면 당장 이어폰을 낀 채 거리로 나가 자신만의 새로운 기억을 그 노래 위에 덧입혀도 좋다. 어쩌면 우리 역시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튀김우동’이나 ‘바나나’ 같은 기억을 발견하고 기분 좋은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귓가의 이어폰을 잠시 빼고
나만의 배경음악을 음미하는 법
취사 버튼이 눌린 전기밥솥이 칙칙거리며 내뿜는 증기 소리, 도마 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서걱거리며 감자를 써는 소리. 우리는 보통 이런 소리를 일상에서 지워내야 할 소란스러운 소음으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악기로 만들어내는 소리만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틀을 깨부순다면 삶을 둘러싼 생활 소음도 저마다의 훌륭한 리듬과 독특한 질감을 가진 음악의 재료로 재탄생할 수 있다. 전기밥솥을 닫는 무미건조한 마찰음에서 일정한 드럼 비트를 포착하고, 도마 위의 서걱거림을 경쾌한 재즈의 리듬으로 변환하는 작가의 시선을 관찰하고 일상에 적용해 보자. 어느새 소리와 소음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진다.
글이 이끄는 대로 소리의 질감을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문득 귓가를 꽉 막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잠시 빼고 주변을 둘러보고 싶어진다. 일상의 소음을 온전한 음악으로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글 속에서 느끼고 나면, 우리에게도 세상을 다르게 듣는 ‘새로운 귀’가 열리기 때문이다. 늘 무심히 흘려보냈던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진동, 베란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하나의 연주로 와닿는 이 경험은, 따분했던 생활 공간을 순식간에 살아 움직이는 공연장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책 속에서
“뚱, 뚱, 뚱, 뚱, 뚱, 뚜, 뚱, 뚱, 뚱, 뚱 뚱, 뚱.”
리듬이 컵라면 위로 곧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가게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면을 입에 넣는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 딥 퍼플이 어떤 밴드인지도 제대로 몰랐다. 그저 카세트테이프 커버에 박힌 검은 배경과 무표정한 얼굴들, 로고의 도발적인 글씨체가 멋져 보였을 뿐이다. 음악은 소리가 크고, 리듬은 거칠었고, ‘착한 아이’들이 몰래라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섭다고 할까. 그 낯설고 약간은 불량한 음악을 들으며 국물이 뜨거운 튀김우동을 조용히 먹었다. 그렇게 딥 퍼플과 튀김우동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게, 한 테이블에 놓이게 되었다.
-17쪽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떠올리면 늘 아침이 따라온다. 그가 실제로 몇 시에 일어나는지, 아침을 챙겨 먹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 폴은 늘 해가 막 올라온 시간대에 존재한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하루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의 공기가 함께 따라오기 때문이다.
아침은 완전히 잠에서 깬 것도 아니고, 하루에 온전히 뛰어든 것도 아닌 시간이다. 몸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생각은 아직 느슨하게 풀려 있고, 창밖의 빛은 사물의 윤곽만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폴의 음악은 정확히 그 상태에 머문다.
여행지에서 묵었던 숙소의 작은 부엌이 떠오른다. 이른 아침, 아직 동네가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토스터에서 식빵이 튀어 오르는 소리와 커피포트의 미세한 끓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그게 누구의 노래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폴이었다. 정확히 어떤 곡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공간에는 이 목소리가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부엌 한쪽에 원래부터 놓여 있던 물건처럼 느껴졌다.
-58쪽
비가 오는 날이면 말수가 줄어든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빗소리가 먼저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창틀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일정한 박자를 갖고 있지 않지만, 리듬이 있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컵을 내려놓고,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소파에 기대 앉는다. 모든 동작이 반 박자쯤 늦어진다. 비가 내리는 날의 템포는 원래 그렇다.
그날 밤도 그랬다. 오후부터 시작된 비가 밤이 되자 조금 더 굵어졌다. 작은 원룸 창가 옆 소파에 앉아L P 한 장을 꺼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Kind of Blue』. 비 오는 날이면 거의 자동으로 손이 가는 앨범이다. 트럼펫의 첫 음이 빗소리와 마주치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88쪽
약속이 취소된 날이었다. 이미 집을 나섰고, 셔츠는 다려 입은 상태였다. 괜히 머리도 한 번 더 정리해 둔 참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다가, 신촌의 카페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돌아가기엔 어정쩡했고, 그대로 서 있기엔 더 어정쩡했다. 예정돼 있던 시간이 통째로 비어버리면, 나는 잠깐 중심을 잃는다.
이어폰을 꽂고 스노우 패트롤(Snow Patrol)의 「Chasing Cars」를 눌렀다. 이 노래는 시작부터 달리지 않는다. 기타는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리듬은 쉽게 개입하지 않는다. 한동안 제자리를 맴돈다. 결론을 미루는 사람처럼, 시간을 조금 더 늘인다. 약속이 사라진 오후와 닮아 있었다.
-102쪽
문을 열자 너바나(Nirvana)의 「Come As You Are」가 흐르고 있었다. 도입부의 베이스 라인이 공간을 먼저 점령하고 있었다. 물결 같은 리프. 단순하지만 방향이 분명한 음. 가게 안에는 낡은 소파와 나무 선반, 그리고L P와 CD가 뒤섞여 있었다. 카운터 뒤에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고, 별다른 인사 없이 고개만 한 번 들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 머신의 증기 소리가 기타 리프 사이를 잠깐 비집고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Come As You Are」는 독특한 곡이다. 가사는 모순을 반복하고, 리프는 거의 변화 없이 지속된다. 공격적인 듯하면서도 어딘가 느슨하다. 긴장과 이완 사이의 애매한 상태가 곡 전체를 끌고 간다. 그날 그 카페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곡이 끝나자 펄 잼(Pearl Jam)이 이어졌고, 다시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가 흘렀다. 선곡에는 일정한 결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약간의 거칠음과 과도하지 않은 분노. 닦아내지 않은 창문을 통과한 빛처럼, 약간의 거칠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카운터 쪽을 보며 “예전에 음악 하셨어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잠시 고개를 들더니 “네, 밴드 했어요.”라고 말했다. 더 설명은 없었다. 대신 다음 트랙이 재생됐다. 같은 앨범의 다른 곡이었다.
-106쪽
중학교 체육관 뒤편에는 낡은 벤치가 하나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철제 프레임 위에 나무 판자를 얹은, 딱 그 시절 학교 뒤편에 있을 법한 벤치. 여름에는 햇볕을 그대로 머금어 바지에 열기가 달라붙었고, 겨울에는 손을 대기조차 싫을 만큼 차가웠다. 그 벤치에 앉아 처음으로 누군가의 워크맨을 빌려 들었다.
워크맨은 이미 여기저기 긁혀 있었고, 버튼 하나는 가끔 말을 듣지 않았다.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살짝 걸리는 손맛이 있었다. 확실히 눌렸는지 아닌지, 소리가 나올 때까지 0.5초쯤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헤드폰을 귀에 걸자 주변의 소리가 한 겹 접히는 느낌이 들었다. 체육관에서 들리던 공 튀는 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는 멀어졌고, 귀 안쪽에서 다른 공간이 열렸다.
그때 흘러나온 곡이 듀란 듀란(Duran Duran)의 「Hungry Like the Wolf」였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상태의 노래는 아니었다.
-128쪽
중학생 때 또래와 조금 다른 음악을 들었다. 친구들이 발라드나 댄스곡을 흥얼거릴 때, LA 메탈 테이프를 가방 안쪽에 넣어 다녔다. 수업 시간에는 책상 밑으로 이어폰을 숨겼다. 담임의 목소리가 교실을 고르게 채우는 동안, 귀 안에서는 기타가 먼저 치고 나갔다. 건조한 교실과 바람만 남은 운동장도 그 소리가 흐르면 조금은 견딜 만했다.
주말이면 시내 음반 가게에 갔다. 회색 간판 아래 좁은 매장, 카펫과 플라스틱 케이스 냄새가 섞인 공기. 유리 진열장 안에 빽빽하게 꽂힌 테이프들을 하나씩 넘기다 포이즌(Poison)의 「Every Rose Has Its Thorn」을 집어 들었다. 겉면의 화려한 스타일과 달리, 곡은 조용하게 시작했다. 어쿠스틱 기타 한 줄이 먼저 나오고, 그 위에 보컬이 낮게 얹힌다. 메탈 밴드의 대표곡이라기엔 의외로 절제된 도입부였다.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