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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1. 일레븐 마이너스 투
2. 뷰잉
3. 레퍼런스 체크
4. 길 찾기
5. 병원 예약
6. 튜브
7. 펍
8. 학교
9. 슈퍼마켓
10. 운전하기
11. 머리 자르기
12. 테라스하우스
13. 커먼
14. 워터스톤스
15. 이스트본
16. 입원
17. 내셔널 트러스트
18. 날씨
19. 정원 가꾸기
20. 홍차
21. 공원
추천의 글
저자 소개
저자 : 라조기
한때 대학원생이었던 회사원. 대학원생 시절의 기억을 간신히 붙들고 ‘탕수육’과 함께 『역사책 읽는 집: 지금 당장 알고 싶은 역사책 29』를 썼다. 평소에는 6시 반에 집을 나서서 해가 지면 돌아오는 월급쟁이로 지내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역사책을 읽고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녹음한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여섯 살 이후에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고, 30대 후반에 가족들과 함께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해외살이를 하고 돌아왔다. 책 읽기, 사진 찍기, 아무 계획 없이 여행하기, 한강 변에서 자전거 타기, 가족들과 캠핑하기 등을 좋아한다. 겪은 일을 사진이나 글로 남겨 놓는 것에 집착하는 편이다. 야구도 즐겨 본다. 어렸을 때는 삼성 라이온즈 팬이었는데, 한동안 냉담기를 갖다가 요즘은 아이들을 따라 두산 베어스를 응원하는 중이다.
자기소개를 하려고 보니 남들처럼 나에게도 깔끔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면이 많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매사 명랑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것 같은데, 게을러서 그런지 때로는 모든 것이 귀찮다. 주장이 선명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면서도 제일 인상 깊게 읽은 책을 떠올려 보면 대체로 수필집이다. MBTI는 검사할 때마다 ENFP가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닌 것 같다. ‘ENFP 호소인’ 정도라면 모를까. 아, 일관되게 타이밍을 잘 못 잡는 것 같기는 하다. 무엇보다 내 주식 계좌를 보니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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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 속으로

독서는 몸으로 겪은 일을 때로는 더 깊게, 때로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돕는다. 보통 직접경험은 총천연색이고 독서와 같은 간접경험은 무채색일 거라고 짐작하지만, 내 경우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여행이든 해외살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겪었던 일들은 색이 빠지고 뼈대만 남아 색칠하기 좋은 밑그림이 된다. 책을 크레파스 삼아 기억 속 이곳저곳을 채워 가는 경험은 여행지에서 처음 느낀 흥분 못지않게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책 소개 코너도 즐겁게 봐 주시기를 바란다.
--- p.12

“아빠, 여기는 치과가 별로 없잖아. 그래서 애들이 내 은니를 엄청 신기해 해. 아침마다 보여 달라고 해.” 이것이 과연 산업혁명의 나라이자 40개국이 넘는 영연방의 본국이자 총생산 규모 세계 5위에 빛나는 영국에서 할 만한 대화인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는데, 나도 이미 안과를 찾느라 어지간히 고생했던 터라 ‘그래, 신기해 할 수도 있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매일 아침 은으로 씌운 어금니를 자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한국에는 테스코보다 치과가 많다는 둥 하면서 조국의 우월한 의료 시스템을 이미 열심히 설파한 모양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아이는 주먹을 눈앞에서 꼭 쥐어 보이면서 덧붙였다.
“그래서 양치질 잘하고 가야 돼. 오늘도 어금니 보여 줘야 하거든!”
--- p.62

그나저나 도심의 펍에서 사람들이 자리에 앉질 않고 밖에 서서 맥주를 마시는 이유는 싱겁게도 2007년부터 실시된 실내 흡연 금지 정책 때문이란다. 흡연과 음주란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나 뭐라나. 일행 중 몇몇이 흡연자일 경우, 안에 자리 잡고 들락날락하느니 그냥 야외에서 맥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자 하는 식으로 시작된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게 하나의 문화가 된 모양이다. 펍이 퇴근 후에 가볍게 한잔하러 가는 곳이라는 점도 영국인들이 펍 내부의 식탁에 앉지 않고 가게 앞 골목에 옹기종기 모이는 이유 중 하나다. 식사할 요량이면 레스토랑에 가지, 펍에 가지는 않는다는 것.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아 참, 펍 앞 골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만 가능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야외 음주가 불법이라고.
--- p.83

영국의 방송국인 ‘채널4’에서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을 말해 준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는데, 슈퍼마켓에 관해서라면 ‘당신이 어디에서 장을 보는지가 당신을 말해 준다(You are where you shop)’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가디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테스코에 가는 사람은 세인즈버리에서 장을 보는 사람에 비해 술에 취해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훌러덩 벗는 추태를 부릴 확률이 높고, 키안티셔(Chiantishire: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의 별칭)에 별장을 소유한 이가 웨이트로스에서 쇼핑을 한다면 리들이나 아스다의 고객은 키안티셔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거나 평생 별장을 가질 전망이 없다고 추정해도 큰 무리가 없다.(...) 테스코에 다니는 이는 가장 아래 단계인 ‘최저수입으로 살아가는(minimum income standard)’ 계층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이 기사를 읽다가 우리 집 열쇠 꾸러미에 달려 있는 테스코 클럽 카드를 떠올리고는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 pp.102-103

머리 자르는 동안 손님에게 말을 거는 것은 불행히도 한국만의 문화는 아닌 것 같다. 영국의 이발사나 미용사도 마찬가지였다. 파크 바버스의 이발사도 내 목에 가운을 걸면서 부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조용히 머리나 자릅시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영어 공부한다 생각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대화의 주제가 가게 이름인 ‘박 이발사들(Park Barbers)’이라는 데 이르렀다. ‘박(Park)’은 한국의 성씨이기도 하다고 했더니만 아저씨는 자기도 박씨 성을 가진 한국인을 안다며 반가워했다. 그 한국인은 바로 ‘지성 박’. 딱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은 아닌 것같았지만, 그래도 축구는 좋아하는지(누가 안 그렇겠나) 한국에서 온 성실한 미드필더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나눴다.
거기서 그만해야 했는데, 신이 난 나머지 나는 박씨 중에 유명한 사람은 박지성뿐이 아니라고, 한국에는 두 명의 ‘박’ 대통령이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발사 아저씨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사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 모든 대화가 서비스의 일부라고 생각해서였는지, 그는 대꾸할 말을 잠시간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두 대통령이 인기가 좀 있었냐고 물었고 나는 의외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냥 그렇다고, 아저씨네 이발소는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대답했으면 무난했을 텐데, 내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뱉은 답변은 이랬다.
--- p.123

테라스하우스에서의 생활처럼, 좋든 싫든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 산다. 이웃이 벽을 마주하고 있으니 큰 소리가 나면 나는 대로 듣고, 축구공이 넘어오면 넘어오는 대로 돌려준다. 싫어도 별수 없다. 그러다 고마운 일도 생기고, 같이 웃기도 하며, 잠시나마 친해졌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연립주택에서의 일상이 아닌가 싶다. 조금 불편할 수는 있으나, 때로는 그 불편함이 연대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벽 너머로 고성이 들릴 때마다 이웃집 부부에 대한 동지애가 솟아났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어지간히 데면데면하게 지내기는 했으나 때때로 음식을 나눠 먹었고, 열쇠를 깜빡 집에 두고 나왔을 때는 그 집 아이들이 담장을 넘어 (!) 우리 집 부엌 뒷문으로, 또는 2층 창문으로 침투해 주기도 했다. 이사 나올 무렵에는 자잘한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 초코파이를 주러 갔다가(정[情] 아닌가 정!) 한국에 가더라도 소식을 전하자며 엉겁결에 메일 주소까지 주고받았으나, 이후 서로 연락한 적은 전혀 없다.
--- p.140-141

탕수육의 추앙 목록에는 지하철, 맥주, 달리기에 더해 역사 공부와 유적지 탐사도 있기 때문에, 에일 맥주를 먹이면서 자꾸 말을 해 보라고 부추기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뛰기도 바쁜데, 언제 저런 걸 보고 자료를 찾아서 머릿속에 넣어 놓는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달리기할 곳이 천지인 데다 몇 발짝 걸을 때마다 대단하든 그렇지 않든 역사적 장소가 튀어나오는 영국이야말로 탕수육이 살기에 꼭 맞는 나라가 아닌가 하는 잡념에 빠지곤 했다. 대부분의 영국인이 기꺼운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매일같이 펍에 갈 뿐 아니라 틈만 나면 동네 구석구석을 달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코리안 보디에 담긴 것 중 적어도 3할 정도는 브리티시 소울인지도 모른다. 탕수육에게 듣고 찾아간 윔블던 커먼의 숨겨진 명소 두 곳을 소개해 보겠다.
--- p.150

이스트본에 도착하자마자 한 여성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와 함께 저녁을 드시겠습니까?”
이역만리 타국의 작은 해변 마을에 살고 있는 한 무리의 여성이 나의 빛나는 외모에 반한 나머지 나를 그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일까? 슬프지만 답은 독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다.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의 여성이 나에게 저 대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장소가 베스트 웨스턴 랜스다운 호텔 로비였고, 나는 체크인을 하는 중이었으며, 그 여성은 점원이었을 뿐이다. 표정은 매우 심드렁했다. 문제는 호텔 점원이 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는지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p.170

버지니아 울프가 1927년에 발표한 소설 『등대로』는 다소간 갑작스럽게, 램지 부인이 아들 제임스에게 건네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한다.
“그럼 물론이지. 내일 날씨가 맑으면 말이야.”
오매불망 등대에 가고 싶어 하는 여섯 살 어린이 제임스는 기쁨과 기대에 들뜨지만 이어진 아버지의 매몰찬 한마디에 금세 풀이 죽고 만다. 램지 씨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날이 맑지 않을 거야.”
(...) 엄밀히 말해서 이곳 기상의 특징은 늘상 비가 온다거나 바람이 분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변덕이 심하다는 것이다. 급변하는 날씨에 일정 기간 노출되면 날이 좋지 않더라도 그게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가 슬그머니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 지금 하늘이 구름으로 엉망진창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뜰지 모른다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소한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점, 종국에는 지나가고야 말리라는 점, 그것을 깨달아 아는 것만으로도 삶이 더 나아진다는 점이야말로 동서고금 강조되어 온 지혜이자 진리 아닌가.
--- p.201

미스 파울러는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의 주인이다. 영국인이 정원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 원예 활동을 무엇보다 즐긴다는 이야기는 런던에 가기 전에도 종종 들었지만, 그는 보통의 영국인보다도 정원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 정원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정원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적지 않은 금액을 물어내야 했다는 불쌍한 세입자들 이야기를 꽤나 들었기 때문이다. 평생 잔디도 한 번 깎아 본 적이 없는데, 이 많은 꽃나무를 무슨 수로 건사한단 말인가.
--- p.210

영국에 온 직후에, 아주 오랜만에 〈노팅힐〉을 다시 봤다. 영국에서 산다는 자각을 과도하게 하고 있을 때라 그랬는지 휴 그랜트가 극중에서 ‘영국인스럽게’ 그려지는 장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대사의 절반 정도가 “맞아요(Right)”, “그렇죠(Of course)”, “실례합니다(Sorry)”인 것 같다거나 하는. 영국인들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법이 없더라, 속을 모르겠더라, 하루 종일 홍차 생각뿐이더라, 만날 날씨 얘기만 하더라 하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흔한 것 같은데, 그런 식의 일반화가 가능하다면 휴 그랜트가 분한 윌리엄 태커야말로 ‘가장 사랑스럽고 귀여운 버전의 현대 영국인’이 아닌가 싶다. 영국, 영국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홍차다. 〈노팅힐 〉의 윌리엄도 미국인 배우 애나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차를 권한다. 그때마다 거절당하는데, 한번은 이런 대답도 듣는다.
“그놈의 차 안 마실 거라고요(I don’t want a goddamn cup of tea)!”
--- p.220

그러나 볕 좋은 봄날 카페 정원에 앉아서 우유와 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시고, 잼 바른 스콘도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튤립과 벚꽃과 또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봄밭을 지나 킹 헨리 마운드를 향해 나지막한 언덕을 천천히 오르다 보니, 잘 사는 게 별건가 싶어졌다. 버트런드 러셀은 1930년, 58세 되던 해에 쓴 책 『행복의 정복』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임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나는 꽃가루 알러지로 빨갛게 부어오른 코를 훌쩍거리면서, 한쪽 손에는 첫째, 다른 한쪽에는 둘째의 작은 손을 잡은 채로 푸르른 녹음 아래 다소곳이 펼쳐진 산책로를 걸었다. 그리고 위 구절을 떠올렸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이 근사한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 대단한 노력 없이도 이 공원의 아름다운 광경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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