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평범한 하루의 속살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
느끼고, 찾고, 다시 살아가는 시간의 길 위에서 만나는 정진선의 시
『시간 다니는 길에서』는 일상의 평이함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한 정진선 시인의 시집이다. 시인은 “시간 다니는 길에서 만나는 일상은 소중하다”고 말하며, 특별하지 않아 오히려 안정된 느낌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을 시의 언어로 붙잡는다. 이 시집은 크게 ‘느끼는 것’과 ‘찾는 것’으로 나뉘어,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외로움, 가족과 친구, 도시의 풍경과 자연의 사소한 움직임을 두루 담아낸다. 시인은 거창한 사건보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 오래 남는 눈빛, 문득 되살아나는 감각을 통해 삶의 속살을 내보인다. 『시간 다니는 길에서』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시간들이 실은 얼마나 깊은 감정의 장소였는지를 조용히 일깨우는 책이다.
느끼는 것, 일상에 남은 감정의 높이
1부 ‘느끼는 것’에서 시인은 사랑과 관계, 도시와 자연, 기억과 현실이 겹치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바라본다. 「사랑하여 초라할 때」는 사랑했던 시간이 “등고선 같은 감정의 높이”로 남는다고 말하며, 이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지형을 그린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시간은 평면으로 납작해지지 않고 손등의 주름처럼 오래 남아 다시 만져지는 흔적이 된다. 「선배의 우산」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의 술자리, 장맛비, 우산 하나를 통해 지나온 세월과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이 시집의 미덕은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다시 보게 만드는 데 있다. 지하철 출근길, 청계산입구역 식당, 카페, 마포대교, 문래동 골목, 결혼식장, 꽃길과 정류장 같은 공간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장소지만,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각자의 감정이 서 있는 자리로 변한다. 「지하철로 출근하기」에서 출근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봉급의 하루를 향해 끌려가는 현실의 감각이 되고, 「축가 부르는 신부 아빠」에서는 결혼식의 축가가 아이를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울음처럼 들린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은 노견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낼 준비의 먹먹함을 그려낸다. 정진선의 시는 큰 목소리로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바라보고, 작게 흔들리고, 뒤늦게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삶의 깊이를 보여 준다.
찾는 것,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붙드는 의미
2부 ‘찾는 것’은 지나온 시간과 현재의 감정 사이에서 의미를 더 깊이 캐내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향, 눈물, 침묵, 꽃, 버스, 바닷가, 오래된 만남, 후배의 전화, 친구의 죽음 같은 소재를 통해 잃어버린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동시에 바라본다. 「눈물」은 외로움에 익숙한 마음이 스스로를 어루만지며 따뜻하게 흐르는 감정을 보여 주고, 「침묵의 끝」은 오래 닳고 파인 시간 끝에 남은 엷은 미소를 응시한다. 이 시집에서 침묵은 단순한 말없음이 아니라,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자 쉽게 설명되지 않는 내면의 자세로 읽힌다. 자연과 꽃을 다룬 시편들도 단순한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길에서 만나는 꽃에」에서 꽃은 자신이 놓인 땅에서 피고 지며, 존재로 고통을 이겨 내는 생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릅 나물 되다」는 가시를 품은 두릅이 새순을 내자마자 나물이 되는 장면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청계천 왜가리, 한 번의 결심」은 살아가기 위해 돌을 쪼는 왜가리의 몸짓 속에서 기다림과 결심의 슬픔을 읽어 낸다. 또한 「후배의 전화」, 「오래된 만남」, 「그대 떠나던 날」 등은 관계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추억과 그리움으로 바뀌는지를 보여 준다. 시인은 사라진 것을 완전히 놓아 보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남긴 목소리, 향기, 눈빛, 풍경을 다시 불러와 현재의 감정 속에 앉힌다. 어쩌면 시집의 ‘찾는 것’은 잃어버린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사라진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이루고 있는 감정의 근원을 확인하는 일이다.
『시간 다니는 길에서』는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하루의 미세한 감정에 오래 머무는 시집이다. 정진선 시인은 사랑과 이별, 가족과 친구, 도시와 자연, 상실과 그리움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지나치는 순간들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시집 속 시들은 화려하게 치장된 언어보다 일상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감각과 사유로 독자의 마음에 닿는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눈빛은 남고, 어떤 풍경은 다시 떠오르며, 어떤 그리움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살아 있다. 『시간 다니는 길에서』는 바로 그 시간의 길목에서 우리가 잃은 것과 붙들고 싶은 것, 그리고 끝내 지켜야 할 감정의 자리를 조용히 비추는 시집이다.
책 속에서
저녁 바다
하늘빛 따라
어둡게 변할 때
외로워져
혼자 가듯 가는 무엇이 있으면
그네
앞으로
다시 뒤로 가듯
주고도 품지 못해
돌아서 가는 무엇이 있으면
마음이
마음을 위해
그 마음에서
떠나야 하는 시간이다
남기며 가는 무엇이 있으면
-「떠나가는 무엇이 있으면」 전문
밤을 깔고
누워
공허의 칼을 꺼내
새끼발가락 위 무의미를 자르면,
걸린 바지에
한 그루
뒤틀린 음영이 걸려 흔들거린다
어둠의 빛깔로
사라진
창가 빛을 위해
유인원 되어 소리 내 웃는다
-「독백」 부분
만남은
설렘으로
욕망을 표현한다
선명한 녹색 잎은
가득 찬 기대이다
어제와 다른
노랑꽃으로
예견하는 탄성
어디 있을까
편히 자리 잡고
숨어
혼자 익는 개똥참외
개똥밭에 누워
익지 못하는 시간 속에
숨어 있는 나
어디 있을까
-「혼자 익는 개똥참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