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우리 한신자 여학생 회장
- 오뚝이 친구 다시 도전해 봐요
나는 만학晩學으로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서, 평균 5세 연하의 학생들과 어울려서 공부를 하였다.
법과에 들어갈 때는 거의가 법관이 되어보려는 꿈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입학할 때(1964년도) 가졌던 꿈을 성취한 행운아도 있지만, 꿈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졸업 후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동기가 3명이나 있고, 대학교수로, 은행원으로, 공무원으로, 경찰로, 사업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여학생은 네 명이 입학했으나 한 명은 중퇴하고 세 명이 졸업했다.
그중에서 한 명은 사대부고 출신으로 교사가 꿈이었기에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여 졸업하자마자 바로 학교 교사로 진출했고, 나는 법관이 되어보겠다고 사법고시 준비를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한신자, 그녀는 정치가가 되는 꿈을 품고 있었다.
3학년이 되자 여학생 회장에 출마했다.
법과 여학생은 주야간 합해도 10명도 안 되는데 문과 학생과 겨루려고 출마하다니….
나는 걱정스러웠다.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경쟁인데….
투표 날이 다가왔다.
문과 학생들에게 에워싸여서, 당선은 기정사실이라는 듯이 당당한 상대 후보자를 보면서 나는 기가 죽어 있었다.
마지막 후보자들의 소견발표 시간, 발표장을 가득 메운 여학생들 앞에서, 먼저 문과생 후보자가 무슨 얘기인가 길게 발표를 한 후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한신자 차례가 됐다. 길게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짧게 발표를 한 후, 끝으로 한 말이 명언이었다.
“내가 여학생 회장에 당선된다면, 나는 여학생을 위한, 여학생에 의한, 여학생들의 여학생 회장이 되겠습니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폭소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투표가 끝나고 한신자 측의 대표로 검표를 지켜보던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계속 한신자 표가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압도적인 표차로 한신자는 여학생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김명복과 나는 얼싸안고 깡충깡충 뛰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투표에서 이긴 승리감을 처음으로 느껴 본 그때 그 추억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여학생 회장이 되자 강의 출석보다는 교내 행사나 대외활동에 열중하게 되었다.
시험 때가 되면 어디까지 시험 범위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집중적으로 공부했는데, 놀랍게도 시험점수가 높아서 교수님들도 놀라셨다. 그녀는 뛰어난 암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부산지역에서 여러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된 분 곁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정치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 의원이 현역에서 떠나자 새로 탄생한 모정당에 입당하여 얼마나 성실하게 봉사했는지, 능력을 인정받아서 비례대표 순위에서 여성 1번을 받았고, 드디어 ‘우리 여학생 회장이 의원 배지를 달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원명단 발표 전날 밤, 변수가 발생했다. 다른 여성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어서 탈락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정당 내부의 실상이다.
그 후, 그녀는 새로 탄생하자마자 이목을 끌었던 ‘이회창’ 씨 정당에 들어가서 봉사를 했다.
그러다가 또다시 예기치 못한 일로 그 당이 무너지면서 그녀는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수녀 출신으로 서독 파견 간호사로 가서 고난 속에서 간호사 일을 마치고 귀국한 둘째 언니가 부산에서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찾아가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 혼자 힘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대외적인 일들을 주로 동생인 그녀가 맡아서 처리해냈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사회복지사를 고용해야만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녀는 용기를 내서 사회복지사 교육기간에 참석하여 교육을 받고, 시험을 쳐서,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야 취득할 수 있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것이다.
정치가가 되어보려던 야망의 꿈을 접고, 언니의 일을 지원하는 사회복지사로 오뚝이처럼 일어선 것이다. 역시 학생 시절에 뛰어났던 그 암기력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언니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아마 국회의원직을 시험을 봐서 당선시킨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합격되어서 의원 배지를 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처음부터 사법고시 시험 준비를 했다면, 벌써 법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아쉬운 감을 느낀다.
정치가의 야망을 안고 도전했던 그녀!
정치가란 능력(재력, 실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줄을 잘 서야 한다고들 한다.
한때는 ‘노란 옷만 입어도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다’고 하던 때도 있었다.
대학 시절! 도저히 이길 수 없으리라 예상했던 선거전에서 당당하게 승리했던 그 재능!
여의도 가는 길에, ‘줄만 잘 섰더라면 그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라도 그녀의 탁월한 능력을 볼 줄 아는 혜안慧眼을 가진 정치인이나 정당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오뚝이처럼 다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6. 7. 『부안문학』)
미국에 사는 친구 영순이에게
영순아, 우리가 벌써 10여 년이 지나도록 만나본 적이 없구나.
그런데도 왜 자주 만난 느낌이 들까?
그건 바로 카톡 때문이구나.
자주 카톡으로 자료나 사진, 그리고 너의 기도문 등을 주고 받고 하다 보니, 자주 만나고 있는 듯하구나.
영순아, 너와 나 사이는 어느 누구보다도 각별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8.15해방 이후, 초등학교 입학 직전이니 벌써 70년이 흘렀구나.
네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면 종종 만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크다. 너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만났지만, 너희 집은 부자 틀이 나는 집이었지.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운동장같이 넓은 마당과 높은 흙담장과 큰 대문이 있는 집.
언니도 두 분, 오빠는 세 분이나 있어서 대가족이었지.
대청마루 구석구석에는 쌀가마니와 과일 바구니들이 항상 널려 있었어.
너희 집 앞에는 여러 그루의 밤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서 밤나무 밑으로 다니다가 밤송이를 얻어맞고 아파서 운 적도 있단다.
집 건너편에는 ‘알미산’이 있었고, 산 아래는 넓은 과수원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먹거리가 풍성했었지.
봄에 살구부터 시작해서 대추, 감, 밤, 사과 등등….
어느 날, 너와 내가 단감을 따서 먹고 그 씨를 과수원 입구 탱자나무 옆에 심었지.
신기하게도 두 개의 씨가 새싹이 솟아 나오고, 무럭무럭 자라났지.
감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위치였는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자라나서 수년 후에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미소가 흘러나오고,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단다.
아마 지금도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옛 과수원의 추억을 지키고 있을 것 같구나.
너는 어릴 때 노래를 잘한다고 너희 큰오빠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지.
너를 음대에 보내서 성악가로 키운다고 하면서, 학예회 때 네가 독창 연습을 하면, 너희 오빠는 날계란을 가지고 와서 너에게 먹일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렇게 호강하던 네가 그 잔인한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쓰라린 슬픔을 맛보게 되었었지.
너를 아기처럼 보호해 주었던 큰오빠는 행방불명이 되고, 가정은 파산이 되고, 너는 고향을 떠났었지.
언니들은 시집을 가고, 둘째 셋째 오빠와 어머님과 같이 너는 서울로 가서 살고 있었지.
나는 20세가 되자, 어머니께서 제발 시집 좀 가라고 졸라대셨단다.
그 당시 나는 열심히 일도 하였지만, 틈틈이 책을 보면서 독학獨學으로 한문 공부를 했고, 오빠가 서울에서 보내준 중고등학교 참고서를 독파하면서 공부를 했지.
왜 그렇게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미쳤을까?
사촌들은 서울에서 다 학교에 다니고, 오빠만 데려다가 공부를 시켜주니까 샘이 나서 그랬을 거야.
나는 계집애라고 무시당하고, ‘시집가면 남의 식구’라면서….
나는 어머니와 타협을 했었단다. 시집보내려고 한푼 두푼 모아 놓은 돈으로 공부를 해서, 내가 벌어서 시집가겠노라고.
그래서 길게 땋고 다니던 머리를 내 손으로 싹둑 자르고, 숙부님 집으로 찾아갔다가 쫓겨나고, 엉엉 울면서 내려와서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다가 너의 집에 가서 한 달만 머물러 있을 예정으로 옷보퉁이를 싸 들고 너에게 찾아갔었지.
나는 검정고시학원에 가서 공부하려고 왔으니, 한 달 동안만 너의 집에 있겠다고 내 꿈을 털어놓았을 때, 너는 쾌히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너도 중단했던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함께 학원에 등록하자면서 선뜻 앞장서서 학원으로 향했었지.
나는 다른 과목은 다 쉬웠으나 영어는 백지상태였는데, 그 날부터 너에게서 A.B.C를 배우면서 영어 공부에 매진했었어. 너는 나의 영어 개인 교사였단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첫날부터 영어 시험지를 받고 이름만 써내고 나왔는데, 1주일마다 영어 시험을 보았으므로, 1주일 동안 너한테서 지도를 받아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1주일 후에 본 시험에서는 70점을 받았고, 2주일 후에는 드디어 100점을 받아 냈더니 영어 선생님께서 놀라시면서 “우리 반에 천재가 나왔네” 하시면서 깔깔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그렇게 출발한 우리는 야간고등학교에 함께 다니게 되었고, 모대학의 2부 시험도 같이 응시했지. 나는 등록금 준비도 못한 처지에 대학에 한 번 합격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 응시했었어.
우리는 합격이 되고, 나는 50% 입학금이 면제되는 장학금을 준다고 통지가 왔었지만, 전액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면 당연히 입학 수속을 했었겠지만 나머지 50%를 낼 형편이 못되었지.
등록을 포기한다고 했더니, 너는 입학금 준비가 돼 있다고 했는데 혼자 다니기 싫어서였는지 포기하고 말았지.
너는 둘째 오빠가 버스 기사였는데, 종종 사고건으로 법원에 불려가서 시달림을 받는 걸 보고 오빠를 도와주기 위해서 법관이 되어보겠다고 하자, 나는 원래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교사가 꿈이었는데, 덩달아서 법관이 되어보려는 꿈으로 바뀌고 말았지.
그러다가 너는 어머님이 떠나시고, 입주 가정교사로 지내다가 결혼을 했고, 나는 시간제 가정교사로 조금씩 모아서 간신히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구나.
그리고 정부대여장학금 덕분에 졸업을 하게 되었지.
너는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갔고, 거기서 신학 공부를 해서 전도사님이 되고, 열심히 전도 활동하는 너의 모습이 장하구나.
이제는 요양원에 다니면서 전도도 하고, 봉사활동도 한다니 자랑스럽다.
지난해에는 심장 수술까지 했다고 했는데, 곧 회복되어서 예쁜 모습으로 찍어 보낸 너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이 놓였단다.
내가 손자들 돌보면서 틈틈이 중국어 공부도 하고, 피아노 교육도 받는다고 했더니, 성경공부나 하라고 핀잔을 주었지.
네 말대로 요즘 교회에서 성경공부 교육을 받으면서 너의 잔소리가 떠올라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영순아, 어느덧 우리도 80을 향해 가고 있구나.
앞으로도 우리 건강관리 잘하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날까지 카톡도 주고 받으면서 살자.
네가 언제 한국에 올지, 내가 미국에 다니러 갈 수 있을는지.
그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만 줄일게….
(2016. 7. 『부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