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중역’은 한국근대시 탄생의 계기이자 방법이었다
저자의 연구는 한국근대문학연구가 방치해 온 문헌학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현전하는 판본을 면밀히 검토해 정본을 확정한 다음 베를렌?구르몽?사맹?보들레르?예이츠?폴 포르 등 각 시인의 번역 경로를 낱낱이 추적한다. 그 결과 드러난 사실은 김억의 번역 저본이 일본은 물론 영미의 번역시집까지 포함한 복수의 텍스트들이었다는 것이다. 또 김억이 다양한 저본을 조합하여 고쳐 쓰거나 새로 쓰는 복잡한 방식으로 중역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역의 범위와 복잡성은 기존 연구의 짐작을 훨씬 넘어선다. 저자는 이러한 중역의 형국을 단순한 오역이나 한계로 비판하는 시각을 뒤집는다. 그 대신 이질적인 타자들의 언어와 텍스트가 층층이 쌓이는 중역의 과정에서 김억 특유의 화법, 문체는 물론 근대적인 시어와 자유시의 문법이 고안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한국문학연구, 비교문학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이르는 지점은 한 나라 문학사의 경계를 넘어선다. 저자는 『오뇌의 무도』를 비서구 식민지 조선이 서양 현대시의 전 지구적 확산 과정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참여한 사건으로 읽어낸다. 『오뇌의 무도』에는 프랑스 현대시, (신)상징주의가 영미, 일본을 경유해서 조선에 이르는 도정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프랑스와는 다른 영미, 일본의 (신)상징주의가 창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이 복수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김억은 그저 일본의 번역시를 조선어로 옮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국화하는 방식으로 프랑스 현대시, (신)상징주의의 전 세계적 전파 과정에 참여했다. 그 결과 『오뇌의 무도』는 한국근대시가 단지 세계문학의 보편적 도정을 따라간 증거가 아니라, 근대가 비서구 식민지에서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킨 생생한 현장으로 다시 읽힌다. 한국근대시연구의 민족주의적 강박, 세계문학과의 동시성의 욕망 양쪽을 동시에 해체하는 이 책은 한국문학연구만이 아니라 비교문학연구의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는 도발적인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