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포식자와 초식 동물이
얽혀 돌아가는 조직 사회
『초식 공무원 생존기』가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공직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과 조직 문화를 정글 생태계에 빗대어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공직 사회라는 거대 정글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화려한 갈기를 세우고 호령하는 ‘수사자’(권력자)들이지만, 묵묵히 행정을 책임지는 진짜 주인공은 조직의 틈새에서 소임을 다하는 다수의 ‘초식 공무원’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다수, 사자도 하이에나도 카멜레온도 아닌 ‘초식 공무원’의 생태와 생존 방식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기록한 보고서다. 이 기록은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매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을 잃지 않으며 공직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균형 감각과 분별력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6쪽
정글 생태계 비유는 저자가 30년 동안 경험한 공직 사회의 속성과 권력의 작동 구조를 일반 독자들에게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수사자 주변에는 다양한 동물이 함께 한다. 암사자는 물론이고 하이에나, 자칼, 독수리까지 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목적이 있지만 모두 수사자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마치 하나의 작은 우주와도 같다. (…) 정글의 모든 관계는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다. 어느 하나가 빠져도 생태계는 무너진다. 수사자가 없으면 질서가 사라지고, 얼룩말이 사라지면 먹이가 없어진다. 하이에나가 없으면 견제가 사라지고, 독수리가 없으면 정화가 안 된다. -64쪽
흥미롭게도 하이에나의 기회주의는 순간적 본능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투자’ 개념을 이해하는 듯이 행동한다. (…) 공무원 사회를 오래 관찰하면 하이에나의 그림자가 보인다. 겉으로는 평범한 일원처럼 지내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냄새를 맡는다. 정보에는 귀신같이 밝고, 변화에는 카멜레온처럼 민첩하다. 그러나 그 재주는 대개 공익이 아니라 사익에 쓰인다. -140쪽
이 책은 조직 문화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긴 하지만 결코 성토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저자는 개인의 일탈보다는 구조의 문제를 살핍니다. 많은 사람이 비판하는 공무원의 ‘복지부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가혹한 문책과 감사라는 뿌리 깊은 불신에 기초한 시스템이 공무원을 방어적으로 만드는 상황을 들려줍니다.
『시경』에서 유래한 복지부동이란 말의 어원은 게으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무기력한 신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면서요. 이 밖에도 계급 사다리를 오르며 겪었던 충격과 좌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소신과 원칙, 어공과 늘공의 구조적 대립, 그리고 MZ세대 공무원들과의 유쾌하고도 치열한 조우까지 공직 생활 동안 온몸으로 겪어 낸 뜨거운 현실 드라마가 생동감 있게 펼쳐집니다.
기린과 토끼에게도
생존 전략은 있다
“개혁의 성공은 혁명보다 어렵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현실과 조직 문화가 그만큼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면 공직 사회의 다수인 초식 공무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저자는 30년간 몸담은 공직 사회를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을 무겁게 견뎌 나가는 동료와 후배 공무원들, 나아가 거의 모든 한국 사회 조직 구성원을 위해 경험에 바탕을 둔 조언을 차분히 들려줍니다. 책의 후반부는 이 가혹한 정글에서 초식 동물에 해당하는 권력 없는 존재들이 어떻게 소신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지키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지, 그들의 생존 전략을 모색합니다.
그 하나의 사례가 예산 부족과 지역 갈등으로 10년 동안 표류하던 지역 대표도서관 건립 사업을,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는 대신 2년 뒤 도지사 선거 공약으로 만들어 완벽한 동력을 확보한 경험입니다. 단기적으로 매달렸다면 큰 무리를 했을 사업을 장기적 안목으로 정책을 설계해 문제를 푼 경험입니다. 저자는 이를 ‘멀리 내다보는 기린의 전략’이라고 일컫습니다. 권력자를 육식 동물에 비유했듯이 초식 공무원의 생존 전략 역시 초식 동물에 비유합니다. 명징하면서도 위트가 넘칩니다.
저자는 기린형 전략과 더불어 기록을 바위처럼 남기는 ‘토끼형’(세밀함), 감정을 배제하고 전략적 멈춤으로 압박을 견디는 ‘사슴형’(시간 벌기), 사표를 던지듯 퇴로를 끊고 소신을 지키는 ‘코뿔소형’(배수의 진), 여러 전략을 결합한 ‘하이브리드형’(우회 전략) 등 다양한 초식 동물의 생존 전략을 저자 체험담과 함께 흥미롭게 소개합니다.
‘천상천하 유아걱정형’
베테랑 공무원이 전하는 공감과 위로
『초식 공무원 생존기』의 큰 반전은 30년 차 고위 공직자의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친근하고 인간적이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결코 영웅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매일 밤 결재 서류를 세 번씩 확인하고도 ‘혹시 내가 놓친 법령이 있어 징계를 받으면 어쩌지?’라며 밤잠을 설치던 소심한 ‘천상천하 유아걱정형’ 초식 공무원이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부하 직원의 실수를 모조리 떠안으려다 내면이 먼저 갉아 먹혔던 번아웃의 순간, 막 9급 공무원이 된 친구 딸로부터 “삼촌, 전 대체 언제쯤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눈물 섞인 전화를 받고 “적어도 7급은 돼야 네 이름 석 자가 보고서에 나올 거야”라며 계급 사회의 씁쓸한 민낯에 대해 조언하는 대목은 애잔함과 공감을 자아냅니다.
이 솔직하고 치열한 고백록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공직 사회의 개혁과 소통이 화두가 된 지금, 가장 시의적절한 책입니다. 또한 공직자가 자기 책무를 다하지 않아 나라가 혼란에 빠진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어렵지만 법과 규칙을 지키며 소신을 다해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공직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아울러 이 책은 조직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수많은 공무원과 직장인에게 가슴을 울리는 위로와 현실적 조언을 따뜻하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