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현실과 초현실, 그 사이에서 나를 찾다
중간자의 시선으로 길어 올린 안효희의 네 번째 시집
· 8월도 9월도 아닌 그 틈에서 만나는 존재들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존재의 문제를 꾸준히 탐구해 온 안효희 시인이 네 번째 시집 『8월과 9월 사이』를 펴낸다. 이번 시집은 57편에 걸쳐 현실과 초현실, 이곳과 저곳, 8월과 9월 사이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존재들의 자리를 묻는다. 시인은 “지도에 없는 나를 찾아 평생을 헤매었다”고 고백하며 등이 굽고 눈이 먼 채로 안개 가득한 현실 속을 지나온 시간을 풀어놓는다.
· 사이의 시간, 그림자를 불러내는 주술
표제작 「8월과 9월 사이」에서 화자는 “가을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야” 하는 8월도, 9월도 아닌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시인은 현실의 시간을 분절하여 그 사이에 존재하지 않던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틈에서 “나무와 새가 붙”고, “손가락이 길어져 발가락에 닿”는, “자고 나면 거짓말처럼 길어지는 목”(「해 질 무렵」), “닳아 없어진 혀”(「삼키거나 내뱉거나…」)와 같은 해체된 몸을 세운다. 이는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고해성사를 향한 죄의식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는 갈등이기도 하다. 일탈과 순응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 목소리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며, 시인이 완전한 해방보다는 유희적인 카타르시스에 머무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 바닥과 나 사이, 경계를 허무는 연결접속
비소통의 대상들과 만나며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
어릴 적 바닥에 선을 긋고 놀았던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땅이었던 공간에서 벗어나
가로막힌 붉은 정지 신호등
내가 모르는 어떤 급류가
바닥을 긁고 있는 것인지…
이제 나를 다 써 버리고 드러난 바닥
울퉁불퉁
점점 넓어지는 불온한 통점
-「바닥」 중
안효희의 시적 화자는 늘 사물들 사이 어딘가에 서서, 무엇과도 연결될 수 있는 감응의 촉수를 뻗는다. 「바닥」에서 화자는 평생 아래로만 여겼던 바닥과 처음으로 마주하며 “이제 나를 다 써버리고 드러난 바닥”에 이르러 바닥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연못 한 그루」에서는 “엎드려 사는 달팽이”가 되었다가 “먹이를 기다리는 고양이”가 되었다가 하는 존재들이 자유롭게 뒤섞이며, “아직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위계도 중심도 없는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 시집에서 소통은 이성적 메시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우연히 부딪히며 생겨나는 감응의 사건이다.
· 흐르지 않으면 사라진다
관계 맺기를 멈춘, 생명의 수축과 존재성
시인에게 존재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수축하고 변형되는 흐름이다. 「의자」에서 낡아서 버려진 의자는 더 이상 누구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연결이 끊긴 존재의 은유이다.
궁극적으로 오래될 수밖에 없는 나는 버려졌다 낯선 이름표를 달고 거리에 내몰린 지금, 새삼 앉을 것인가 서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집을 나서야 무언가를 깨닫는 것처럼, 지루했던 어제, 그것은 평화였다 (…) 그동안의 아침과 저녁을 지우고 나는 어떤 새로운 비행으로 꿈을 바꾸어야 할까!
_「의자」 중
「무작정, 그늘」의 화자는 “자신을 버려야 나의 색이 변하고 너의 맛이 변하는” 비행을 감행하며, 「만난 적 없는 내가 수없이 들락거리는」에서는 “거울” 앞에서 “마흔아홉 번째”의 낯선 삶을 지각한다. “발목이 시린 관 속 같은 방”에서 “굽은 마지막 손가락을 펼”(「봄의 증거」)치는 시인은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흐르지 않는 존재, 더는 누구에게도 욕망되지 않는 존재야말로 이미 죽은 것이라 말하며 “쉬지 않고 나를 흔드는… / 쉬지 않고 너를 흔드는…”(「접속」) 흔들림이야말로 살아 있는 증거라고 노래한다.
중간자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그린 안효희의 이번 시집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사이를 떠도는 이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책 속으로
오늘의 끝, 우울의 한가운데에서 속절도 없이,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이… 얼굴 없는 얼굴, 비가(悲歌) 속에 나를 가둔다
--- 「속절없이」 중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끔은 아무도 모르는 세상이 태어난다
나의 몸에 솟대를 세운 오후
정수리에 꿀벌이 앉는다
꽃이라 인정되지 않는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번개
내 몸에도 피뢰침이 있다는 걸 알았다
--- 「곁에서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은 낮꿈」 중에서
절벽을 만들어낸 엄마
막내딸 시집가는 날
꽃들의 고통으로 불러댄 엄마
서로의 등을 쓸어내리며
엄마를 보내드렸다
--- 「언니」 중에서
신의 손길 같은
그런 아침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 거야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과거가 된 그날
씁쓸하고 쓸쓸한 맛
살아갈수록 쿨룩거리는 거야
그물에 걸리지 않는 허공으로 날아가는 거야
--- 「씁쓸한 맛」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