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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서문

〈1부 스트린드베리〉
1장 스트린드베리의 병리학적 전기
2장 스트린드베리의 세계관
3장 스트린드베리의 작품들

〈2부 창조성과 광기에 대하여〉
1장 스베덴보리
2장 병적 체험과 창조적 형식
3장 횔덜린
4장 반 고흐
5장 정신분열증과 작품의 관계
6장 정신분열증과 시대의 문화

참고문헌
주석
저자 소개
저자 : 칼 야스퍼스 (Karl Jaspers)
‘실존철학’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고 ‘실존철학’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최초로 쓴 독일의 철학자다. 실존철학은 물론 심리학, 정신의학, 정치철학, 세계철학사 등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를 기반으로 여러 저작을 남겼다. 그가 28세에 쓴 『정신병리학총론』은 아직까지도 정신병리학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학을 먼저 전공하고 심리학, 철학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온 독특한 이력은 그가 철학을 하기 위해 일부러 선택한 과정이었다. 야스퍼스 스스로 의학과 자연과학을 섭렵한 자신에게서는 철학이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이력 덕분에 과학자들에게는 철학자로 여겨지고 철학자들에게는 과학자로 여겨지는 곤란함을 겪었다. 야스퍼스가 보기에 철학자들은 실재를 너무 도외시했고 과학자들은 사유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
야스퍼스의 평생의 화두는 독단에 빠지지 않는 참다운 철학이었다. 나치 시절에 부인 거트루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휴직을 해야 했을 때 한 마지막 강의에서 “우리의 강의는 중단되지만 철학함의 자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해 그치지 않는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태도는 나치 통치가 종식된 후 독일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바젤로 이주하게 된 이유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중들이 자신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야스퍼스에게 대중의 인기는 “우정 어린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참답지 못한 것이어서 유해한” 것이었다. 나치 시절을 지나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죄책이며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통치되는지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바젤에서 야스퍼스는 헛된 명성에서 벗어나 인기와는 무관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평생토록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살았던 그는 그 덕분에 오히려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았다고 한다. 어디에서나 소박함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는 생전에 매입해 두었던 조국 독일을 바라볼 수 있는 묘역에 묻혔다. 평생 스스로 ‘다르게는 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존재’라 묘사했던 그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
주요 저서로 『정신병리학총론』(1913), 『세계관의 심리학』(1919), 『현대의 정신적 상황』(1931), 『철학 I, II, III』(1932), 『이성과 실존』(1935), 『실존철학』(1938), 『죄책론』(1946), 『진리에 관하여』(1947), 『철학적 신앙』(1948),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 『원자탄과 인류의 미래』(1958), 『계시에 직면한 철학적 신앙』(1962)이 있다.

역자 : 홍성광
서울대학교 인문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 읽기와 글쓰기』, 니체의 『니체의 지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헤세의 『헤세의 여행』, 『잠 못 이루는 밤』,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 『소송』, 『변신 외』,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헬렌 켈러 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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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긴 호흡으로 펼쳐지는 천재성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성장한다.
병든 천재 역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을 파괴한다.”

이 책에서 야스퍼스는 심각한 정신병적 위기를 겪은 네 명의 비범한 정신인 극작가 스트린드베리, 신비주의 철학자 스베덴보리, 시인 횔덜린, 화가 고흐의 사례를 면밀히 비교하고 분석한다. 그들이 남긴 작품과 자전적 기록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증언까지 방대한 자료를 모아, 정신질환이 한 인간의 실존과 세계관, 작품 내용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광기와 창조성의 관계를 정신의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를 병적학(病跡學)이라 한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 같은 근대 철학자들과 하이데거, 라캉, 들뢰즈 같은 현대 철학자들도 창조와 광기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오늘날에도 그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다. 『스트린드베리와 반 고흐』는 초판 출간 후 한 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이 작품을 넘어서는 병적학 연구는 없다는 평가를 받는 고전적 저작이다.

인간의 삶과 창조는 결코 병명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 책은, 정신질환을 환자의 삶의 맥락, 주관적 경험, 창조 행위와 연결해 이해하려 한 초기의 시도라는 점에서 오늘날 인문학적 정신건강 담론과 연결된다.

‘광기 어린 천재’에 대한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 야스퍼스와 ‘병리학적 전기’ 연구

“자기 분야에서 전무후무한 성취를 이루지만 천재성에 수반된 광기 때문에 파멸적인 고통을 겪는 천재”의 이야기는 우리를 곧잘 매혹한다.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샤인〉(199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이야기를 담은 〈뷰티풀 마인드〉(2001년)가 그러했고, 가공의 이야기지만 〈블랙 스완〉(2010년) 역시 극심한 강박과 압박감 속에서 서서히 미쳐 가는 천재 발레리나의 파멸적 예술혼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물론 이 작품들 모두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광기와 창조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것이다.

19세기 말에 근대적 연구 방식으로 자리 잡은 병적학(病跡學, Pathographie)은 광기와 천재성의 관계에 대한 오랜 관심이 정신병리학적 전기(傳記) 연구로 발전한 정신의학의 한 분야다. 주로 유명한 예술가나 사상가의 자전적 기록과 작품, 편지, 주변 사람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삼아 정신질환이 그들의 삶과 세계관, 창작에 남긴 흔적을 추적한다.

야스퍼스의 『스트린드베리와 반 고흐』는 병적학 역사에서 이정표가 된 저작이다. 이 책에서 야스퍼스는 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 횔덜린과 고흐라는 네 명의 인물을 나란히 놓고, 그가 당시 ‘정신분열증(Schizophrenie, 조현병)’으로 파악한 병적 과정이 각 인물의 삶과 세계관, 작품 세계에 미친 영향을 면밀히 살핀다. 이 저작에서 야스퍼스는 “인간의 삶과 창조성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정신병리학적 사례 연구를 철학적 인간 이해와 예술적 창조성에 관한 탐구로 확장했다.

병을 설명하는 정신의학에서
병명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을 사유하는 철학까지,
인간의 삶과 창조성, 그 이해의 한계를 탐구한 대담한 기록

『스트린드베리와 반 고흐』는 전체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 야스퍼스는 스웨덴 출신의 위대한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자전적 기록과 작품들을 통해 그가 체험한 질투망상과 박해망상, 환각과 종교적 전환이 그의 삶과 세계관, 작품 세계에 스며드는 과정을 추적한다. 야스퍼스는 “스트린드베리의 정신분열증을 그의 작품과 연관 지어 살펴보려면 전혀 다른 형태의 정신분열증 사례와 비교해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2부에서 스트린드베리와 유사한 스베덴보리, 전혀 다른 사례인 횔덜린과 반 고흐를 비교하며 병적 체험과 창조적 형식의 관계를 살핀다.

“어떤 대상을 다루는 연구가 우리 존재의 한계와 근원을 향해 의식적으로 밀고 나아갈 때, 그 연구는 철학적인 것이 된다. 이 책은 1922년에 응용 정신의학 논문집으로 처음 발표되었으며, 인간의 삶과 창조성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 내가 추구한 것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지배적 통찰이 아니다. 실제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을 마련해주는 수단으로서 통찰이다.” (‘머리말’에서)


‘스트린드베리 유형’과 ‘고흐 유형’

이 책에서 다루는 몇몇 사례에 의지한다면, 횔덜린과 고흐는 함께 하나의 유형을 보여주는데 이 유형은 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를 통해 예시되는 또 다른 유형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고흐와 횔덜린 같은) 이들은 내면에서 곧장 밀려오는 체험을 열정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물론 이 형상화는 끊임없는 통제와 규율의 의지 아래 이루어진다. 이 환자들에게서는 내면에서 직접 밀려오는 체험의 힘이 워낙 강력하기에, 그에 상응하여 규율과 통제의 의지 또한 비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의 작품에 나타나는 내용은 순전히 대상적인 것이어서 쉽게 이해된다.” (198쪽)

“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의 경우 정신분열증은 본질적으로 작품 안에서 소재적이고 내용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반면에 횔덜린과 반 고흐의 경우에는 가장 내적인 형식, 즉 창조성 자체가 정신분열증에 영향을 받는다. 전자(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의 경우에는 결코 실제적인 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며, 문학적 생산력은 최종 상태에도 지속된다. 후자(횔덜린과 반 고흐)의 경우, 작품들은 격렬한 정신적 격동 속에서 자라나는데, 그 움직임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며 그 정점 이후로는 해체 과정이 점점 더 강해져 결국 최종 상태에는 창조 능력도 문학적 생산력도 멈춘다.” (292~293쪽)

자신의 광기를 낱낱이 기록한 현대극의 선구자, 스트린드베리

스웨덴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1849~1912)는 자연주의 극(劇)에서 몽환적이고 상징적인 후기 희곡에 이르기까지 현대극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90년대 중반 이른바 ‘지옥(Inferno) 위기’라 불리는 극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자신이 체험한 망상과 환각을 『지옥』과 『전설』을 비롯한 자전적 저술에 생생하게 남겼다. 야스퍼스는 이 방대한 자전적 기록을 토대로 삼아 스트린드베리가 겪은 정신병의 경과와 그의 세계관, 작품의 변화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추적한다.

“(고흐와 횔덜린 같은) 이들은 내면에서 곧장 밀려오는 체험을 열정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물론 이 형상화는 끊임없는 통제와 규율의 의지 아래 이루어진다. 이 환자들에게서는 내면에서 직접 밀려오는 체험의 힘이 워낙 강력하기에, 그에 상응하여 규율과 통제의 의지 또한 비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의 작품에 나타나는 내용은 순전히 대상적인 것이어서 쉽게 이해된다.” (198쪽)

“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의 경우 정신분열증은 본질적으로 작품 안에서 소재적이고 내용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반면에 횔덜린과 반 고흐의 경우에는 가장 내적인 형식, 즉 창조성 자체가 정신분열증에 영향을 받는다. 전자(스트린드베리와 스베덴보리)의 경우에는 결코 실제적인 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며, 문학적 생산력은 최종 상태에도 지속된다. 후자(횔덜린과 반 고흐)의 경우, 작품들은 격렬한 정신적 격동 속에서 자라나는데, 그 움직임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며 그 정점 이후로는 해체 과정이 점점 더 강해져 결국 최종 상태에는 창조 능력도 문학적 생산력도 멈춘다.” (292~293쪽)

자연과학에서 영적 세계로 건너간 두 세계의 사상가, 스베덴보리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는 스웨덴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신학자이며 서양 신비주의 사상사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당대에 이름난 자연과학자이자 공직자로 활동하다가, 50대 중반에 천사들을 만나고 영계(靈界)를 목격하는 체험을 한 뒤 신비주의자로 변모했다. 이후 그는 이러한 체험을 『천국과 지옥』을 비롯한 방대한 신학 저술로 체계화했다. 야스퍼스는 스베덴보리의 변화를 전형적인 정신분열증 사례로 파악하며, 스베덴보리가 보았던 영계의 풍경들이 주관적 환각을 넘어 그 자신에게 ‘직접적이고 최종적인 현실’로 다가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는 자신의 환영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말하기를 피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밤마다 그의 방에서 악령들을 크게 꾸짖는 소리를 들었고, 급기야 낮에도 그러는 것을 들었다. 때로 그의 시선은 눈에서 불꽃이 이는 듯 완전히 달라 보였다. 사람들은 여러모로 그가 미쳤다고 여겼다. 그는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교회 설교를 끊임없이 반박하는 영들 앞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쪽)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구절들 가운데 숨겨진 의미를 지닌 것들을 열거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가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은 오직 주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에만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이러한 체험들은 전형적인 증상이다. 예컨대 환자들은 신문 광고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한다고 믿는다. 그 의미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확실하며, 꾸며낸 것이 아니다.” (188쪽)

신의 번개를 붙잡아 노래로 건넨 시인, 횔덜린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시 형식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그리스적 정신을 독일어 시 속에 새롭게 구현한, 독일 근대시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1800년대 초부터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었고 1806년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1807년부터 생애 마지막 36년을 튀빙겐에서 치머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보냈다. 1800년경부터 1806년 무렵까지 쓰인 그의 후기 시는 오랫동안 정신적 붕괴의 산물로 치부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독일 시의 언어를 근본적으로 바꾼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 야스퍼스는 횔덜린의 후기 시에 나타난 변화를 질병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병적 과정과 새로운 시적 창조가 만난 복합적 사례로 살핀다.

“정신분열증이 시작된 이후에도 그리스적 주제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제 그리스 정신은 횔덜린에게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문제가 되었다. … 비록 정신분열증의 고통과 현실의 곤경 속에 있었지만, 그것은 그에게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온전히 작품 속에서 살아갔다. 그 안에서 그는 하나의 비상(飛翔)을 체험한다.” (216쪽)

“반 고흐가 자신의 그림 작업을 ‘피뢰침’이라 여겼듯, 횔덜린은 시를 통한 형상화를 하나의 구원으로 여겼다. 이때 중요한 것은 위험한 메시지를 숨기거나 일부만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형상화하는 일이다. 은폐된 비밀이 아니라 창조가 중요한 것이다. … 마치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의 번개에 맞은 세멜레에게서 태어났고, 그리하여 이제 천상의 불이 필멸의 인간에게 안전한 음료로 주어지듯, 시인은 신의 뇌우를 받아내어, 형상을 얻지 못하면 파괴되고 말 그 신적인 것을 노래에 담아 건넨다.” (226쪽, 227쪽)

그림을 정신의 피뢰침으로 삼은 화가, 고흐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붓질로 근대 회화의 감각을 바꾼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스물일곱 살 무렵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으며, 프랑스 남부에서 〈해바라기〉를 비롯한 대표작들을 그렸다. 말년에는 반복되는 정신적 위기를 겪고 생 레미 정신병원에 머물렀지만 그 기간에도 왕성하게 작업했으며 자신의 상태와 예술에 관한 생각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히 기록했다. 야스퍼스는 고흐의 후기 작품을 병적 과정에서 격화된 내적 체험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결과로 보았으며, 그 과정이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예술가 자신을 파괴로 이끌었다고 보았다.

“나는 내 작업을 장악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운다. 그리고 내가 이긴다면 그것은 내 병에 가장 좋은 피뢰침이 될 것이라고, 나는 내 병을 잘 다스려 이겨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249쪽)

“(횔덜린이나 고흐 같은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괴테에게서 정점을 이루는 유형이 있다. 이 유형에서는 인격이 결코 작품 속에서 남김없이 사라지지 않고 작품 뒤에 여전히 남아 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괴테 같은 사람에게는 횔덜린의 후기 시, 반 고흐의 그림,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입장이 생경하다. 그런 창조 속에서는 창조하는 인간 자신이 소멸한다. … 그가 표현해내는 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체험과 동요이다. 그런데 그 체험과 동요는, 어쩌면 의식과 감정의 작용이 달라지고 내면의 질서가 느슨해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일 수 있으며, 동시에 그를 파괴로 이끄는 과정이 된다.” (265~266쪽)

“횔덜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반 고흐의 예술적 변화가 컸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 변화는 정신병이 전혀 없었더라도, 혹은 정신병에도 불구하고, 본래 지니고 있던 정신적 지향만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는 반론이다. … 하지만 ‘새로운 양식’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펼쳐지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정신질환이 시작된 것이 ‘우연’이라면, 나는 그것이 매우 기이하게 보일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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