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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지구를 떠나보자|궤도를 이탈한 겨울, 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2|그 골목의 벽|모래시계|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합니다|냉동인간|사막이 왔다|계엄이 왔다 - 사막이 왔다 물아일체 편|날개 부러진 선풍기|이곳|길 위에서의 안부|겨울나무|내 마음의 아픈 새 한 마리|배가 고픈 여자|벽|길들이 뒤척거렸다|아무것도 슬프지 않고 외롭지 않은 겨울, 눈|물 위에 쓰다|그 도시|폭풍의 언덕

2부. 거기, 계십니까?
문득, 전화|거기, 계십니까?|바라는 대로 - 계십니까?|싱크홀sink hole|해방일지|긴 이야기|눈 오는 날|사회생활|일몰日沒|바람 부는 날|두고 온 이름 하나|중독|가벼운 밤|비가 내렸다, 비가|그날|오래된 질투|근황|북한강은 청춘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현실 변주 편|도시를 떠나는 짜라투스트라 - 여운 편|별

3부. 봄 다시 봄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벚꽃|봄이 오면|영월寧越|봄봄|난 괜찮다|봄|꽃|민들레|당신의 산山|길 위에서|우연한 여행자|사랑은|작별하지 않는다|봄이 온다는 것은|봄 속으로 가자|봄 다시 봄|나는 낙원으로 간다|우리는 낙원으로 간다 - 나는 낙원으로 간다 물아일체 편

발문_ 해피엔딩을 복원하는 기린의 산수算數, 혹은 쓸쓸한 빈틈의 시학 · 박제영
저자 소개
저자 : 유문호
1962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하이텔 문학상과 『문예사조』 신인상, 계간 『오늘의 문학』 신인 작품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사랑, 지나가다』, 소설집으로 『쿵! 하고 안드로메다』, 동화집으로 『깃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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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실패를 껴안는 기린의 산수, 그리고 실존적 해피엔딩
- 유문호 시집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

시인 유문호가 첫 시집 『사랑, 지나가다』(2000) 이후 무려 26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달아실 刊)을 상재했다.

· 26년의 침묵, 한 번도 시를 떠나지 않은 자의 귀환

두 번째 시집을 펴내기까지 무려 26년 만이다. 분초 단위로 유행이 명멸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문학장 안에서 이토록 긴 침묵은 흔치 않다. 세속의 잣대로는 시의 영역을 이탈한 오랜 방황으로 비쳤을 테지만, 책임편집을 맡은 박제영 시인의 말처럼 그는 “한 번도 시를 떠난 적이 없었다”. 빈집에 들어앉아 밥이 되지 않는 시를 쓰는 일을 스스로의 ‘팔자소관’이자 ‘위로’라 명명하는 시인의 말은, 이 시집이 자본의 영토 바깥에서 오랜 시간 숙성된 영혼의 순례기임을 방증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이란
찬란한 결실을 손에 쥐는 일이 아니라
꽃 피우지 못한 계절의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용서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 부분

이번 시집은 구차하고 비루한 ‘지구적 삶’에서 출발하여, 상처와 환멸로 점철된 ‘우주적 망명’을 거쳐, 마침내 강원도 영월의 사과나무 아래라는 구체적이고 토착적인 공간에서 실존의 미학을 완성하는 궤적을 그린다.

· 자본의 산수(算數)와 ‘기린’의 진화론

시집의 전반부를 관통하는 핵심 모티프는 박민규의 소설을 시적으로 변주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연작이다. 시인에게 유년의 ‘산수’란 가난과의 유대관계였다. 외상 계란빵 하나를 반으로 갈라 두 개로 만들어 먹던 기억은 정량적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고 심리적 허기를 채우려는 가련한 발버둥이다. 구로공단의 매연 속에서 목을 길게 빼고 하늘을 향해 시꺼먼 연기를 뿜어대던 ‘기린’의 형상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삶을 갈아 넣어야 했던 누이와 소시민들의 피눈물 나는 역사로 치환된다.

이 가난의 산수는 2026년 현재의 디지털 자본주의에 이르러 더욱 심화된 소외를 낳는다.

스마트가 스마트하는 세상, 느리고 더딘 나는 눈과 귀가 어두운 인간이 되었다. 뉴스를 봐도, 전화기를 들어도, 거리의 간판을 봐도 못 알아듣는 말들이 많아졌다. 하나만 알면 가능했던 세상이 그 이상을 넘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경험하지 못했던 숫자들은 이해 정도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의 물품을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산수 속의 물리학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2」 부분

창구가 없어진 대합실과 키오스크가 점령한 세상에서 대화의 단절을 겪는 시인은 자신을 허허벌판의 “스톤헨지”로 인식한다. 유용성과 속도만을 강요하는 시스템 속에서 낙오된 이들은 무념무감한 눈빛으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이는 자본의 폭력 앞에 소외된 단독자가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존적 존엄이다.

· 사막이 된 도시, 환멸을 건너는 풍자

2부의 시선은 시인이 건너온 도시의 어두운 풍경과 정치·사회적 환멸을 거침없이 기록한다. 「모래시계」 속 “새벽 3시의 사막”은 불경기로 인해 불을 끄지 못해 별이 되어버린 상가들이 즐비한 도심이며, 「그 도시」는 줄을 서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결국 과로사로 밀려나는 비참한 사육장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회적 억압과 재난에 대해 날 선 풍자를 아끼지 않는다. 「냉동인간」에서 담뱃값 인상이라는 소시민적 스트레스 앞에 냉동인간이 되기를 자처하는 인물이나, 「사막이 왔다」와 「계엄이 왔다」 연작을 통해 한 인간의 사소하고도 미친 권력욕이 빚어낸 시대적 황당극을 폭로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바람이 분다. 거짓말이 쏟아진다. 그렇게 계엄이 왔다”라는 서늘한 진술은 진실이 실종된 시대를 향한 깊은 환멸의 표출이다.

· 실패의 복원, 어쩌면 해피엔딩이라는 구원

시집의 진정한 절정은 단종의 유배지이자 까마득하게 잊혀가는 공간인 강원도 ‘영월’에서 이루어지는 사과나무와의 대면이다. 시인은 산골로 들어와 사과나무를 심고 십수 년을 돌보았으나 나무는 끝내 사과를 맺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성과 유용성의 기준으로 보면 이는 완벽한 ‘실패’이자 낙오다.

그러나 시인은 표제작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을 통해 놀라운 시적 반전을 선언한다. “사과를 품지 못했다고 해서 그 나무의 봄이 거짓이었을 리 없다”는 자각이다. 결실이 없다고 해서 사과를 꿈꾸며 땅 밑에서 자신을 밀어 올린 봄의 과정까지 부정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세속이 말하는 해피엔딩의 정의를 전면 수정한다. 진짜 해피엔딩이란 화려한 성공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꽃 피우지 못한 결핍 가득한 과거의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용서하는 일이다. 타인의 유쾌한 꽃밭을 향했던 실존적 질투를 거두고, 상처받고 멍든 자리로 다시 손을 뻗어 결핍을 결핍대로 인정하는 성찰의 미학이다.

· 쓸쓸한 빈틈의 길을 걷는 청춘

시인은 거칠 것 없는 금빛의 창공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자신에게 없음을 잘 안다. 대신 그는 땅에 남아 얕은 바람에도 허리를 휘는 들풀들의 자리, 즉 “구부러진 마음 한쪽의 빈틈”을 선택한다. 그 쓸쓸한 빈틈의 길을 날 듯이 걸어가는 것이 시인이 도달한 마지막 실존의 양식이다.

이제 시인은 홀로 걷지 않는다.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리는 낙원으로 간다」에서 이웃들의 이름을 부르며 걸어가는 그 낙원은 멀리 있는 이데아가 아니라, “나의 피로와 웃음이 섞인 자리”, 즉 “언제나 지금”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유문호 시인의 『나와 사과나무 그리고 어쩌면 해피엔딩』은 겨울의 논리를 흙 속에서 무너뜨리고 ‘동사(動詞)’로 깨어나고자 하는 봄의 선언문이다. 자본의 산수에 치여 목이 길어진 이 시대의 기린인 당신들에게, 이 시집은 어쩌면 쓸쓸하고도 따뜻한 구원의 문장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 시인의 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빈집에 들어앉아
밥이
되지 않는
詩를 쓴다.

즉, 팔자소관八字所關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함에 다름 아니다.


2026년 사과, 꽃을 기다리며
유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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