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인문지리학의 대가 이-푸 투안은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됩니다.”(《공간과 장소》, 19쪽)라고 했다. 시인은 이십여 년 위양못을 거닐며 나무와 꽃과 새들을 만났다. 못물에 떨어지는 빗방울, 풍경을 열고 닫는 아침안개를 만났다. 시인은 그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그곳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못물에 비치는 고요와 자기 발견의 소중한 순간을 물가 벤치에 옮겨 놓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완재정은 아름다운 경관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경》에서부터 내려오는 시 「겸가」가 흐르고 있어, 자연스레 “완연히 물 가운데 있구나.”라고 읊조리게 만든다. 완재정의 주인공 권학산의 생애가 주는 감동 또한 남다르다. 이번 시집은 한마디로 위양못과 완재정을 통해 지역과 장소, 역사를 형상화한 지역문학의 한 전형이다.
시인의 말
위양못 만나러 가면
못은 왕버들 사이에 숨고
서어나무 숲으로 걸어가고
어떤 날은 소나기 뒤에 서 있고
어느 날은 얼음장 아래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어린 청둥오리들, 짝을 이룬 원앙
기러기 무리는 안다
기다림조차 벗으면
위양못 거기,
당신을 만날 수 있으리.
1,2부는 이십여 년 위양못 마실 다니며 쓴 시들이고
3부는 시골과 자연이 슬그머니 건네는 쉼표들이고
4부에는 완재정과 학산 선생의 숨은 이야기를 담았다.
책 속에서
위양못 마실
사람들 떼 지어 몰려오면
못은 얼굴 가리고 잘 숨거든요.
옥교봉에 살풋 비 묻어올 때나
얼음장 밑에서 거문고 현이 튈 때
왕버들이 손끝으로 또박또박 사연을 쓰거나
때죽나무가 길에다 꽃편지를 부칠 때
걸음 한번 하세요.
서어나무 잎이 하늘 가득 손바닥 무늬를 찍어대거나
개밥바라기별이 그대 마중 나올 때
기러기 물고 온 새벽안개가 눈뜨자
원앙 무리 짝지어 나들이할 때
그 언제쯤
슬그머니 마실 왔다 가요.
-p.14
위양못, 비 내리고
개구리밥 사이로 길을 여는
포실한 오리 등짝에
도르르 미끄러지는 숨결
왕버들이 숨긴 푸른 그늘에
오글보글 솟는 모음들
완재정 반듯한 섬돌 끝에도
토닥 톡톡 튀는 글자들
뜻도 모르고 떠듬거리는데
안개가 눈을 가린 차일봉
쏴아-
앞에 선다.
-p.30
사월을 여는 수화
위양못 왕버들 새순이
햇살 가득 찍어
못물에다 글을 쓰네.
바람이 금세 지워도
마음에 물결 일어
하,
입을 다물지 못하네.
-p.46
좀 미안한
그대가 아무리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해도
나만 꽃이었던 때가 있었지.
그대와 그대 그대가
이렇게 향기로 꽃으로 오는 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나만 꽃이 아니었다니.
-p.75
시는 지었으나
-완재정(宛在亭) 시
내 늘그막에 이 못을 사랑하여
조각배에 몸을 띄워 날마다 노닐며
《시경》 「겸가(??)」 장을 읊었네.
“갈대는 우거지고 이슬은 맺혀 서리가 되었네.
그분은 물가 한 켠에 있구나.
물을 거슬러 따르려 해도 길은 막히고 머네.
물결 따라 내려가려 해도 완연히 물 가운데 있구나.”
‘완연히 물 가운데 있구나’[宛在水中央]
이 한 구절에 빠져 끝없이 읊조리다 보니
내 마음의 ‘그분’[伊人]이
못 가운데 정자에 앉아 있네.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우뚝한 섬 하나만 남는구나.
그 섬에다 붓으로 정자를 지었네.
완연히 계신 그분을 그리며
‘완재정(宛在亭)’이라 불렀네.
(……)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