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기획 노동을
우리는 얼마나 무시해 왔는가
“돌봄을 받는 사람은 보이고, 돌봄을 기획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을 눈으로 확인하고, 임금으로 계산하는 일이라고 배워왔다. 그래서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정하는 일은 좀처럼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분명 누군가의 시간과 에너지,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손에 잡히는 결과물도, 근무 시간도, 임금도 없다. 무엇보다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측정되지 않는 노동은 쉽게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노동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어렵다.
김희경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는 왜 돌봄을 이야기하면서도,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은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 문제를 떠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노동은 끝내 개인의 책임으로만 남겨졌을까. 저자는 ‘기획 노동’이라 부르는 개념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제도를 연결하는 ‘삶의 운영’에 관한 노동을 이야기한다.
된장찌개를 끓이는 데는 30분,
그전에 얼마나 많은 정신적 노동이 필요한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일정을 챙기고 계획하는 과정이
직장 일 못지않게 힘든 노동.”
‘왜 내가 고작 이거 하고도 힘들지?’ 가전제품은 점점 똑똑해졌지만, 왜 살림과 육아는 여전히 버거울까. 사회도 회사도 아닌, 작은 공동체인 가족의 일상을 꾸려갈 때에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정신적 노동이 들어간다. 냉장고 속 재료를 파악하고, 가족의 식성을 고려해 식단을 짜고, 장보기 일정을 맞추고, 아이의 학원 일정을 조율하는 일. 눈에 보이는 집안일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에너지는 보이지 않는 계획과 조정에 쓰인다. 이 책은 삶을 운영하는 책임이 어떻게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그 책임이 왜 오랫동안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는지를 추적한다.
돌봄은 갑자기 시작되지만, 책임은 끝나지 않는다
“엄마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 못할까 봐 아등바등했다.”
부모를 돌본다는 것은 곁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부모의 삶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가족은 여럿이지만 돌봄의 중심은 한 사람에게 쏠린다. 그 책임은 대개 딸에게 넘겨지고, 특히 결혼하지 않은 딸에게 향한다. 저자는 부모 돌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안에서 돌봄의 책임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지워지는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 거대한 부담을 더 이상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가 돌봄의 책임을 함께 나눌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두려운 장애아 엄마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하는 말
“엄마한테 달렸다.”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에게 돌봄은 하루의 반복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과제와도 같다.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와 교육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지만,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정답도, 매뉴얼도 없는 길에서 엄마는 아이가 세상이라는 곳에서 방향을 잃지 않도록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장애아 엄마의 이야기는 돌봄이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끊임없이 설계하고 책임져야 하는 복합적인 기획 노동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장애 당사자에게 기획 노동은,
“자신의 고유한 신체 특성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번역’의 과정.”
우리는 돌봄을 받는 사람은 그저 도움을 받기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 당사자의 삶은 그와 정반대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지,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지, 자신의 몸과 감각을 어떻게 상대에게 전달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조율해야 한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몸을 맡기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선택하고 설계하는 일이다. 저자는 장애 당사자들의 이야기에서 돌봄은 제공하는 사람만의 노동이 아니라, 돌봄을 받는 사람 역시 치열한 기획 노동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려주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돌봄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이름 없는 노동’을 개인의 희생에서 사회의 몫으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책임도 함께 나눌 수 있다.”
기획 노동은 어느 특별한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도, 부모를 돌보는 집에도, 장애가 있는 가족이 있는 집에도, 그리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당사자의 삶에도 존재한다. 삶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늘 먼저 생각하고, 미리 준비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친다. 이 책은 오랫동안 개인의 책임으로만 여겨졌던 돌봄을 사회의 문제로 다시 묻는다. 이름 없이 수행되어 온 노동을 드러내는 일은, 누군가의 희생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책임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돌봄을 다시 정의하는 순간,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 또한 달라질 수 있다.
추천사
돌봄 노동은 성별을 ‘넘어선’ 인간의 조건이다. 이 책은 왜 인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일을 여성이 전담하고 있는지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분석한다. 가전제품의 발달과 예전보다 ‘가사에 참여하는 남성들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에게 요구되는 일은 줄지 않을까. 왜 여성들은 끝이 없고 보이지 않는 노동에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다”며 좌절하고 분투하고 있을까.
저자가 제안하는 ‘기획 노동’ 개념은 여성들의 노동 시장에서의 첫 번째 노동, 퇴근 후의 가사와 육아 그리고 이 모든 노동을 24시간 머릿속에서 기획하고 조정해야 하는 세 번째 노동을 설명해 준다.
이 책은 거시적 접근과 미시적 시각의 이분법에 도전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왜 한 사회의 지속과 국가 정책의 의제인지를 명확히 한다. 가사 노동과 육아에 대한 남편들의 ‘무기화된 무능력’과 ‘의도된 부주의’는 여성의 비혼과 저출생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이다.
자신의 일에 부담과 혼란을 느끼는 여성, ‘사랑하는 아내’를 착취하면서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남성, 저출생이 문제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문제의 본질을 여전히 모르는 정치 종사자들의 필독서이다.
_정희진(《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여성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