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으로
모든 제노사이드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며칠이나 몇 주 만에 실행되고, 다른 것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수백만 명의 사람이 연루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수천 명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제노사이드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실행되지만, 다른 것들은 더 분산되고 산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제노사이드 사례는 어떤 면에서 저마다 독특하지만, 공간적·시간적으로 묶어보면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의 살육 사건들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역사적 시기는 연루된 학살의 유형과 성격에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물론, 우리는 비교적 풍부한 문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먼 과거의 제노사이드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역 및 거대 제국의 변방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훨씬 적다. 그럼에도, 지난 3천 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서 나타난 제노사이드적 폭력에는 무서울 정도로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한다.
---pp.41-42
끔찍한 학살이 뒤따랐다. 지도자들을 잃은 촐룰라 사람들은 집들과 건물들을 불태우고 도시 인구를 학살한 스페인 사람들을 상대할 기회가 없었다. 코르테스는 왕에게 썼다. “우리는 너무 치열하게 싸워서 두 시간 만에 3천 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촐룰라 사람들과 친하지 않았던 틀락스칼라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학살을 계속했다. 일부 여자들과 아이들은 살아서 산으로 도망쳤다. 코르테스의 비서가 쓴 것처럼, 스페인 사람들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오로지 시신들 위만을 밟으며 지나갔다.” 수천 명, 어쩌면 만 명에 달하는 촐룰라 사람들이 죽었다.
---pp.115-116
원주민에 대한 강제 계약 노동이 1863년까지 합법이었던 탓에, 유키족 아이들은 준노예나 하인으로 빈번하게 납치되었다. 그 결과, 1857년 보호구역 요원이었던 빈센트 가이거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인디언들에게는··· 아이들이 거의 없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 대부분이 도난당했거나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정착민들의 습격에 대응한 유키족의 산발적인 보복은 정착민들을 더욱 격분시켰을 뿐이었으며, 일부 정착민들은 유키족 전원을 말살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원주민들이 정착민의 종마 한 마리를 훔친 결과로 유키족 240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돼지 스무 마리를 잃었다고 주장한 한 농부는 그 자리에서 원주민 세 명을 쏘아 죽였고, 그 죄목으로 다른 원주민 네 명을 보호구역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p.151
굶주린 마을을 떠나려고 시도하는 농민들은 강제로 되돌려 보내졌고, 다른 공화국과의 접경 지역은 봉쇄되었으며, 농민들 이 도시로 식량을 찾아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검문소가 세워졌다. 수백만 명의 농민이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안, 크렘린은 우크라이나 농촌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무시했다.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가 스탈린에게 기근의 참상을 호소하려 하자, 스탈린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태업이 침묵 속에 진행되었고 겉보기에 꽤 평화로워 보였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네. 이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소비에트 국가를 훼손하려고 했어. 이것은 죽음을 건 싸움이라네, 숄로호프 동지.”
---p.218
지난 3천 년 동안 발생한 제노사이드 사례에는 많은 유사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전쟁은 집단학살의 온상 역할을 한다. 군사적 대립과 파괴 행위는 빈번하게 집단학살로 ‘스며들거나 전이’된다. 전쟁이나 잠재적 전쟁 상황에서의 외부 적대 세력이든,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내부 적대 세력이든 가상의 적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 행동은 집단학살 작전에 앞서 나타나며 이를 수반한다. 여성을 성폭행하는 행위는 가해자 가족 안에 노예 혹은 아내로 삼기 위해 여성을 강제적으로 납치하는 것을 포함하여 역대 수많은 집단학살 사례에서 나타난다. 제국들이 식민지화와 정착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전리품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는 원주민의 축출을 동반하며, 이는 너무 자주 집단학살로 귀결된다.
---pp.33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