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일인칭 '나'의 고백과 늙음의 미학
『내가 고요해질 때』는 시인이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자기 성찰’이 돋보입니다. 지난날에 대한 참회와 회한조차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소중한 시간으로 긍정하며, 물질과 정신의 욕망을 모두 비워낸 '아무런 거리낌 없는 삶의 태도'를 담담히 노래합니다.
뜰앞에 나갔다/ 찻잎에 머문 푸른 햇살 한 줌과/ 별빛 이슬에 재운 노란 산국 향기 꺾어 들어와/ 김치와 토마토 장아찌 접시에 옮겨 담는다/ 밥상을 장식한다/ 이제 좀 먹을 만하니/ 가만히 묻고 빙긋 웃는다
― 〈소중한 대접〉 중에서
어린왕자의 마음으로 그린 '그림의 시'
환갑이 넘어 바오밥 나무를 찾아 마다가스카르로 떠났던 시인은, 동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전통적 ‘시화(詩畵)’의 세계를 자신만의 서체와 감성으로 구축했습니다. 그 편편의 그림들이 먹향 가득 스민 한지에 차분한 색으로 색색 번져납니다.
불편했을까 그렇게 흘러갔으면/ 일렁이며 흔들리던 것들/ 이윽고 고요해질 때/ 나를 기다려주었던 나무를 그렸다/ 길을 따라오던 별들을 내걸었다
― 〈내가 고요해질 때〉 중에서
작고 가벼운 것들을 향한 다정한 시선
칠십의 구비를 건너는 시인의 공간은, 차분한 ‘소박 화려’입니다. 구멍 난 양말을 다비식 치르듯 태우며 ‘양말별’을 상상하고, 뜰 앞의 산국 향기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며 빙긋 미소로 화답하는 소소 일상 속에서 삶의 깊은 무게를 차분 비워내자 제안합니다.
몰랐다 구멍 났구나/ 냄새나는 두 발을 끌고 어제까지 온/ 양말 버리려다/ 그간의 노정 떠올리며 두 손을 모은다/ 빨아 말려서 반듯이 개어/ 퇴고 끝난 파지 살펴/ 깨끗한 관을 두른다/ 순장도 이렇겠지
― 〈양말별〉 중에서
인간 존엄과 성정에 대한 믿음
그의 곁에서 자연의 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풍파를 맨몸으로 견뎌온 구례 택시기사 이병운의 주름진 삶부터, 인연이 닿았던 여러 스승과 벗들까지, 시인은 사람 본래 아름다운 마음 결에 깊은 헌사를 보냅니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택시는 잘 굴러가겠지만/ 서울 갔다 오는 길/ 전라도 구례구역에서 경상도 악양 집까지/ 다음엔 맑고 환한 날에도 불러서/ 양녕대군 십팔 대손 병자 돌림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지리산 ‘구례 택시 이병운’을 들려줘야지
― 〈구례 택시 이병운〉 중에서
『내가 고요해질 때』는 삶의 거센 파도를 헤쳐나가는 이땅 사람들에게 전하는 잔잔한 기록입니다. 숨가쁠 대로 가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박남준 시인의 맑고 수수화려한 글과 그림은, ‘잠깐 쉬어도 돼, 조금 천천히 가도 돼’, 하며 느릿 말투로 지친 마음 달래주는 다정 위로입니다.
시인의 말
동경했다.
소박한 쪽으로 끌렸지만 진달래 피면 화전놀이하고 찻잎 덖어 나누며 단오절이면 맑은 희망을 담아 벗들에 부채를 건넸다. 검은 학은 날아올까 거문고를 가까이 하려도 했으나
아주 오래전이다. 마을 스피커를 흔드는 슬픔이 궁금했다. 같이 울어주고 싶었을까. 면사무소 아저씨로 내달렸다. 바이올린이라 했다. 떼를 썼다. 때굴때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단식 투쟁도 불사했으나 배가 너무 고팠다.
젊은 날 북장구징꽹과리에 홀려 미쳤다. 조금 늙어서 동네 락밴드 보컬, 하모니카 온갖 잡동사니를 내세우고 가설무대 마이크를 잡았다. 어찌 흔들리지 않았을까. 내 가여운 광대를 춤추었다.
탐욕이다.
시가 되지 못한 그림이 그렇다. 그러나 무릎 쓰지 않고서는 바닥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움 없이 어찌 함부로 세상의 이름은 부를 수 있을까. 아직 사랑이 남아 그림시집을 낸다.
다친 무릎을 끌고 불시착을 한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천년 전주 사랑모임>과 이종민 선생의 전주와 지리산자락 악양 동매마을을 오가며 이 시집이 이뤄졌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 부끄러움 셀 수 없으나 부럽지 않았다.
오는 시 자주 내쳤으나 시인으로 산다.
말이 많아진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