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생명과 생명을 잇는 틈, ‘베케’를 닮은 정원
베케. 외국어인가 싶은 이 생경한 단어는 제주어다. 제주의 농부들은 땅을 일굴 때마다 나오는 크고 작은 돌들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어 밭의 경계를 따라 쌓아 두곤 했는데, 이 돌무더기가 바로 ‘베케’다.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든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의 증거인 이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들은 땅 밖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돌과 돌 사이의 크고 작은 ‘틈’은 작은 생명들이 추위와 바람,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은신처가 되어 주기도 하고, 이끼와 양치식물에게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최고의 서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 때로는 여기에 족제비 같은 동물이 지나다니는 통로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나무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생명을 품은 베케는 또 다른 생명을 취해 살아가는 새 같은 다른 동물들도 불러 모은다. 옛날에는 이 돌무더기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어른들에게는 쉼터가 되어 주기도 했다. 작은 ‘틈’은 바로 이렇게 모든 것을 보듬고 이어 주었다.
제주 서귀포시에는 ‘베케’라는 이름의 정원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생태조경 설계 시공 업체인 ‘더가든’의 김봉찬 대표가 지금까지 자신이 실험하고 경험했던 지식을 반영해 조성한 곳이다. 우연히 부모님이 귤농사를 짓던 과수원 터에서 발견한 이 돌무더기의 흔적이 지금의 베케정원을 탄생시켰다. 베케정원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 주는 ‘베케’와 닮아 있다. 베케정원에서는 누구나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여러 생명들이 베케의 틈에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눈 앞에 펼쳐진 풍광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연스러움’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내가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본능적 감각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연의 힘과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정원을 꿈꾸며
정원 부지에 지어진 카페에 들어가면 누구나 감탄의 소리를 낸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제주의 숲 어딘가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한 이끼정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풍경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정원 지면보다 낮게 지어진 건물 바닥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눈높이가 낮아져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저절로 ‘우러러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정원의 식물과 눈높이를 맞추게 되고, 땅에 돋은 작은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곤충 등 다양한 생명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베케정원은 우리가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않던 곳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으며 자연을 마주하는 자세를 배우는 곳이다.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 식물을 도구적으로 이용했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정원을 여러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모두의 집’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비록 정원이 인간이 만들어 낸 ‘편집된 자연’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여러 생명이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나가는 나름의 생태적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연의 힘과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정원, 생명력이 넘치며 다양성이 존재하는 정원. 바로 베케정원이 추구하는 중요한 목표 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이 야생 생물이 서식하는 집, 즉 ‘서식처’라는 관점에서 정원을 조성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베케정원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식물 하나하나의 삶을 존중하는 방법, 계절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에 큰 의미를 둔다.
생태·자연주의정원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
베케정원의 의미와 역사, 정원의 내용을 소개하는 이 책은 크게 ‘일곱 계절’과 ‘아홉 정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일곱 계절은 베케의 시간을, 아홉 정원은 베케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일곱 계절’은 계절에 흐름에 따라 베케의 식물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 주면서 정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여기서 ‘일곱 계절(초봄, 봄, 초여름, 여름, 가을, 늦가을, 겨울)’은 정원의 시간 흐름을 세심하고 정교하게 구분한 칼 푀르스터의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일곱 계절’ 부분의 글에서는 식물 공부하는 법, 양치식물 키우는 법, 이끼정원 관리법, 나무 모아 심는 법, 정원디자인에서 빛의 중요성 등 정원에서 식물을 가꾸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내용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정원사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아홉 정원’ 부분에서는 베케의 조성 과정과 베케의 아홉 주제원(입구정원, 이끼정원, 빗물정원, 퍼너리, 낙우송정원, 폐허정원, 나뭇길, 실험정원, 재배정원)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특히 ‘베케의 디자인 원리’ 부분에서는 서식처 기반의 생태정원과 자연주의정원의 원리를 근간으로 베케정원에 담아내고 싶었던 것들, 정원을 만들면서 고민했던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어서 실제로 생태·자연주의정원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실용적인 정보도 제공한다. 베케정원에 식재된 식물 목록은 물론 일부 식재 도면도 수록되어 있다.
책 속에서
자연주의정원 혹은 생태정원은 자연의 힘과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져 공간을 공유하는 정원은 시시각각 빛·바람·물의 경이로운 순환과 그에 따른 반응을 새롭게 보여 준다. 현재의 정원은 사람을 위한 장식, 힐링, 사상이나 예술 혹은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방식 등의 목적을 뛰어넘어 인류를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물종들이 보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또한 야생의 생물이 서식하는 집, 즉 서식처를 의미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정원을 만들고 관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식물도 그들의 서식환경과 특성을 이해하고 이에 맞게 재배해야 제대로 키울 수 있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단순한 수집이나 전시보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식물은 살아 있는 생명이고 그들 모두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이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배려했을 때 정원은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와 교감할 것이다.
사람들은 유독 식물의 꽃에 집중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기후조건에서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한 달이 채 되지 않는다. 식물은 1년의 대부분을 줄기와 잎이 만드는 식물체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시선을 돌려 식물의 형상과 이것을 이루는 요소들을 살피고 좀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식물의 형상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공간을 고민한다면 정원을 대하는 시각과 감성이 확장될 것이다.
숲정원은 자연 숲을 모티브로 하되 단순히 숲의 외형을 모방한다고 완성되지는 않는다. 경관과 더불어 정원식물들이 상호작용 하면서 지속적으로 생태적 다양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공간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숲정원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자연의 숲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시작일 것이다.
정원에서 태양 빛이 주는 효과는 엄청나다. 아주 작은 정원에서도 식물들 안으로 빛이 담길 때 우리는 대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정원을 만드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빛을 고민하게 되고, 공간 안으로 빛과 어둠을 담는 다양한 방식을 진지하게 고찰하게 된다.
지구의 모든 식물은 정원식물이며 거기서 내 정원의 환경에 맞고 내가 추구하는 정원의 미학과 철학에 적합한 식물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를 기다려 잎을 펼치고 잊지 않고 꽃을 피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해진 때를 앞당기려 조급해하고, 해야 할 것들을 미루던 날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자연 앞에서 나를 들추고 되새기는 곳, 겨울 정원은 그렇게 깊어져 다시 봄에 가 닿을 것이다.
식물은 형태적으로 점과 선이 풍부하다. 정원은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한 점과 선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다. 겨울나무가 그려 내는 가지의 선과 겨울눈의 점이 대비되는 모습, 점이 되어 흩날리는 꽃잎과 낙엽, 그라스의 가늘고 부드러운 선과 숲의 나무들이 그려 내는 강직한 선의 중첩은 정원에 리듬감·깊이감·변화감을 더하는 것은 물론,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무수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