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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초저녁 서쪽 초승달
반짝이는 갈색 등짝
다락에 박제된 빛
낮의 반달
바나나꽃 자줏빛
알 수도 있는 사람
보름달
봉숭아, 모피코트 그리고 꿀
안녕을 비는 절벽
밤의 반달
팥배나무 열매와 무, 그리고 무화과
돌멩이를 목에 두른 새
새벽 동쪽 그믐달
코코넛향 단추
납작한 서류 한 장
삭, 윤달 보름, 숲
숲으로 간 여자들

배미정의 ‘아는 여자’를 말한다
저자 소개
저자 : 배미정
부산에서 태어나 양산에서 자랐다. 골목길을 뛰어다니면서도 허공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던 일곱 살 아이, 그 아이를 잊고 지내다 20대 중반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면서 다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매번 새로운 그림을 그릴 때마다 붓질을 처음 하는 것 같은 마음이다. 늘 한참 헤매고 흔들리지만 세상 빛을 온전하게 담으려 한다. 그림을 그리는 고3 청소년, 부산에서 일하는 남편, 청소년보다 나이가 많은 벤자민고무나무 한 그루, 매해 열매를 맺고 있는 무화과나무 그리고 고양이 ‘가지’와 함께 살며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스산한 기쁨〉(2011, 관훈갤러리), 〈애정지도〉(2012, 갤러리 도스), 〈무용지물무용지도〉(2014, 갤러리 도올), 〈아늑한 구석〉(2016, 서울시 NPO지원센터 갤러리 품다), 〈사랑받고 있구나〉(2018, 갤러리 도올), 〈도래할 마을〉(2018, 보름산미술관), 〈아는 여자〉(2020, 프로젝트 스페이스 영등포) 등, 쉬지 않고 그림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instagram @humorr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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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이 된 미술관’으로 초대합니다

화가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하고 싶은 말을 그린다. 시인이 고심 끝에 단 하나의 시어(詩語)를 고르듯 깊고 깊은 생각의 우물에서 신중하게 형태와 색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삶을, 누군가의 삶을 담는다. 그림 그리는 일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일곱 살 아이는 결국 남들보다 늦게 미술대학에 들어갔고, 지금도 쉼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에게 그림은 여전히 나의 삶을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는 사람’ 배미정이 초대하는 이번 전시회가 열리는 곳은 바로 ‘책’. 이번엔 “말보다 빨리 빛으로 떠올라” 그림이 된 것들은 물론이고, “사소하고 내밀하지만 또렷이 구체적으로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순간들을 ‘존재시키기’ 위해” 쓴 글이 함께한다.

내 손톱이 된 그녀, 내 머리카락이 된 그녀, 내 젖가슴이 된 그녀들의 이야기

작가는 “마음 깊은 곳에 박제되어 있던 빛을 꺼내 보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원치 않는 병을 얻게 된 선배 언니, 꽃을 사랑하는 엄마,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것 같은 나를 떠올리게 했던 이모, 비겁한 자신을 돌아보게 한 어린 시절 친구, 모피와 꿀 파는 일을 했던 신비롭고 강한 큰엄마, ‘늙음’을 겪지 못하고 죽은 주인집 아주머니, 온 마음을 다해 절벽 틈새에 몽돌을 올리며 소원을 빌던 이름 모를 여자들. 이 책에 등장하는 배미정의 ‘아는 여자’들은 모두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늘 세상 언저리에 머물다 사라진 ‘그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며 사랑하며 살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아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겪어 왔던 모든 여자들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마음 깊은 속에 박제된 빛으로 존재하던 “반짝이고 있었던 그들의 삶”은 작가가 어두운 모퉁이에 다다를 때마다 나타나 길을 밝혀 준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과 글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그 ‘박제된 빛’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며, 변하고 있어도 하나다

빛이 사라지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달. 영원히 한쪽 어두운 부분은 볼 수 없는 달. 늘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만 결국 ‘하나’로 존재하는 달. 작가는 달의 순환 주기에 따라 ‘아는 여자’들의 삶을 배치한다. 작가의 구체적인 경험에 기반한 글과 그림이지만, 이 책의 글과 그림은 사실과 허구,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든다.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일기인지 알 수 없다. 글마다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은 하나의 ‘그녀’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글의 시제도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계속 오간다. 그림이 보는 이의 시선으로 그 의미가 완성되듯 배미정은 그의 글과 그림이 누군가의 삶과 중첩되어 완성되는 ‘열려 있는’ 글이길 원한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의미가 되고 삶이 된다

분홍색 잇몸이 드러난 틀니, 윤기 나는 갈색 웨이브 가발, 고운 빛의 봉숭아꽃, 절벽 틈새에 보석처럼 박힌 몽돌, 배 속을 드러낸 무화과 열매, 썩어 가는 모과, 형형색색의 나방, 말라붙은 화분, 부서지고 있는 빛이 남긴 무지개. 배미정의 그림에는 작가는 어째서 저 장면을 그림 안에 붙잡아 둔 것일까, 하나 같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 자리하고 있다. 책에 실린 이 사연 있어 보이는 64점의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의미가 되고 삶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배미정의 그림은 ‘색’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발광(發光)하는 그 색이 별것 아닌 일상의 순간에 특별한 의미를 입힌다. 현실과 비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화려하고 강렬한 색은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화가 서수경은 “그림을 그리며 삶을 배우고, 배운 것으로 나를 확장해서 ‘나’라고 고집했던 비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점점 더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사람이 화가”라고 했다. 화가 배미정이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아는 여자’ 이야기는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소중한 삶의 한 조각에, 삶의 진실에 당신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책 속에서

말하기 전에 그림이 되어 튀어 오르며 다가오는 어떤 순간도 있고, 말로 이야기로 주절주절 떠들고 싶은 순간도 있다. 단 한 명이라도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가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순간도 있다. 내밀하고 사소한 순간을 기억에 새겨, 내가 사랑했던 혹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 몸속 어딘가에 보듬고 싶은 순간이 있다. 약속된 언어로 공감을 이끌어 내고 싶은 마음이 커질 때가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림과 글은 그 마음이 쌓인 결과다. 말보다 빨리 빛으로 떠오르는 것들은 그림으로 그리고, 사소하고 내밀하지만 내 기억 속에 또렷이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순간들은 기억하고 ‘존재시키기’ 위해 말로 이야기로 풀어내 보았다.

내 몸속에는 내가 알고 사랑하고 겪어 왔던 모든 여자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나는 내가 겪어 왔던 모든 여자들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렇게 느끼고 있다. 세상 언저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보이지 않다가 사라진 그녀들, 혹은 여전히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지만 삶을 지속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며 사랑하고 살아가는 그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그녀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세 살 된 애를 억지로 걷게 하다가 결국 등에 업고 걷고 있는 그녀의 이모도 단지 한 점의 그림을 실제로 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그녀의 마음과 같았을까? 좋아하던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도 없었고 애가 두 명이라 훌쩍 떠날 수도 없었던 이모는 그래서 시름시름 마음이 곪아 버린 것일까? 곪아 버린 마음이 급기야 몸까지 뒤덮어 버린 것일까? 그녀는 보고 싶은 그림 앞에 겨우 서 있다. 대머리 시각 장애인 세신사가 되어 힘없이 기대어 앉은 이모의 등을 하염없이 밀어 주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 이모의 등이 기억 속 피부의 빛처럼 표백된 듯 하얗지 않고 불그스름하게 생기 있는 분홍빛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오르막에 올라서 사방을 빙 둘러보는데, 기암괴석 절벽이 아니라 돌멩이가 놓일 수 있는 빈틈마다 자리를 잡고 있는 동그란 예쁜 돌멩이들이 저 높고 넓은 절벽과 한몸이 되어 놓여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온 절벽이 안녕을 비는 마음으로 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온 마음이 느껴졌다.

7000년 넘게 살고 있다는 삼나무 ‘조몬스기’ 앞에 당도했다. 엄청난 세기의 바닷바람과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있는, 이끼로 뒤덮여 온통 초록빛이 감도는 삼나무가 그 자리에 그렇게 여전히 머물러 있다. 진희와 사슴들은 웅장하고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삼나무 밑동 사이로 난 길을 통과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는 것처럼. 현재에서 과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미래에서 현재로 가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뒤엉킨 느낌이지만 자신을 온전하게 느끼고 있는 진희. 순간 돌아보니 사슴들은 온데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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