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으로
젊은 날의 나는 기다리면 다음 차가 오고, 길을 잘못 들어도 얼마든지 다시 돌아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낡은 터미널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며 오래 버티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p.7
어떤 마음은 한참이 지나야 겨우 보인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마라는 한 사람을 생각하는 일도 그랬다. 끝난 일이 아니라, 다른 나이의 나에게 거듭 도착하는 일이었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였을 리 없다. 한때는 딸이었고, 젊은 여자였고,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지나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을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던 밤. 할 말은 많은데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던 시간들.
---p.9
그때는 엄마가 왜 저런 모습으로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서운한 일이 있어도 엄마는 다음 날이면 밥을 차
렸고, 늦는 가족을 기다렸고, 아픈 데는 없는지 또 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인지, 책임인지, 오래 몸에 밴 습관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없었다.
---p.28
나는 엄마가 가만히 있는 줄만 알았다. 엄마가 어떤 바람을 맞고 있었는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엄마는 그때 그 어마어마한 상실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고, 이제는 나도 그곳에 와 있다.
---p.31
평생 식구들 먹을 것을 챙겨 온 엄마에게 누군가 차려 준 밥 앞에 앉아 자기 몫만 먹는 일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p.48
엄마는 또 한 번 나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미 본 길을 보지 않은 척할 수는 없었다. 어떤 마음은 접기 전에 한 번쯤 끝까지 따라가 봐야 한다. 그 끝에 별것이 없더라도.
나는 그 마음을 따라가 봤다. 별것도 있었다. 잘했다 싶을 만큼 뿌듯했고, 그래서 뭐가 남았나 싶을 만큼 허탈하기도 했다. 그저 삶이었다. 목적 같은 것은 아니고.
---p.78
엄마가 살아온 날들이 너무 고단해 보여서 내 서러움은 번번이 별것 아닌 일이 됐다. 엄마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하려다가도 결국 가장 오래 힘들었던 사람은 엄마였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도 그랬고, 엄마가 떠난 뒤에도 그랬다. 나는 엄마를 미워할 만큼 자유롭지 못했다.
부모의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아이는 자기 서러움을 뒤로 미루는 데 익숙해진다. 하지만 엄마가 힘들었다는 사실과 내가 엄마 때문에 힘들었다는 사실은 둘 다 사실일 수 있다. 엄마의 짐이 무거웠다고 해서 어린 나의 짐이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p.85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애쓰는 동안에는 미처 알지 못한다. 그 사람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품에서 마음 놓고 울었어야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미움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이 그제야 비로소 보인다.
---p.134
나는 엄마가 무슨 걱정을 하며 살았는지는 알았지만, 엄마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는 궁금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야 할 것을 하나도 묻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했다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셈이 빠르고 기억력이 좋았던 그 머리로 어디까지 가 보고 싶었는지.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외삼촌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모습을 보며 억울했던 적은 없었는지.
평생 남 걱정을 하면서, 한 번쯤은 누가 자기 걱정을 해 주기를 바랐는지.
누구의 딸도, 누나도, 아내도, 엄마도 아닌 채로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p.142
나는 오랫동안 더 나은 곳, 더 안전한 곳, 더 그럴듯한 삶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내 자리에 닿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주 늦었다고 느꼈고, 아직 멀었다고 여겼다. 그 마음이 쌓이면 삶 전체가 미완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 보니,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리는 멀리 있는 다른 삶이 아니었다. 자주 흔들리고, 자주 엉망이 되고, 그래도 다음 날이면 또 별일 아닌 듯 지나온 이 자리. 대단한 빛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지극히 찬란했던 이 자리.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막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이미 내 삶 한가운데를 지나오고 있었다.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