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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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테네’ 보스턴과 인류의 재판
1927년 8월 메사츠세츠 주 보스턴, 두 사내의 처형이 임박해 오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사형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파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 밖에는 탱크가 출동하여 성난 군중을 막아섰다. 런던의 하이드파크에는 시위자들이 군집했고 제네바에서는 미국 상품이 판매되는 가게와 영화관이 공격당했다.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는 동맹파업이 벌어졌고 수송이 중단되었다.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시청 바깥에서는 미국 국기가 불에 탔다. 시드니, 부쿠레슈티, 베를린, 암스테르담,...
‘미국의 아테네’ 보스턴과 인류의 재판
1927년 8월 메사츠세츠 주 보스턴, 두 사내의 처형이 임박해 오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사형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파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 밖에는 탱크가 출동하여 성난 군중을 막아섰다. 런던의 하이드파크에는 시위자들이 군집했고 제네바에서는 미국 상품이 판매되는 가게와 영화관이 공격당했다.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는 동맹파업이 벌어졌고 수송이 중단되었다.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시청 바깥에서는 미국 국기가 불에 탔다. 시드니, 부쿠레슈티, 베를린, 암스테르담, 로마,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 마라케시의 거리에 흥분한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아인슈타인은 곧바로 쿨리지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고,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미국 정부를 향해〈유럽 노인의 호소〉를 발표했다. 작가 존 더스 패서스는 ‘두 개의 미국’을 선언했다. 1920년대 미국은 베이브 루스와 찰스 린드버그, 잭 댐프시가 화제의 중심이던 ‘재즈 시대’였다. 가전제품과 텔레비전이 보급되었고 대중문화와 스포츠가 유행을 선도했다. 전국의 잡지 판매대에는《리더스 다이제스트》(1922), 《타임》(1923) 같은 새로운 잡지와 통속소설들이 넘쳐 났고 연예 잡지들은 유명인과 스타의 산실인 할리우드의 뒷얘기를 실었다. 한편 1920년대 미국은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 혁명가들이 활약하고 노동운동이 확산되던 ‘적색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다. 1919년 5월 1일 존 록펠러, J. P. 모건, 미첼 파머를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에게 폭발물이 배달되기도 했다. 곧이어 법무장관 미첼 파머와 에드거 후버(나중에 FBI를 창설하여 사망 때까지 국장으로 재직)의 지휘 아래 좌익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파머 일제검거’ 광풍이 몰아쳤다. 버트런드 러셀, H. G. 웰스,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월터 리프만, 업턴 싱클레어, 존 듀이, 버나드 쇼, 아나톨 프랑스, 로맹 롤랑, 이사도라 던컨……. 당대의 명망가들이 대거 구명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전기의자에 앉게 된다. 오랫동안 두 사람을 보아 온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교도소 바깥에는 기마경찰과 무장한 경관들이 ‘사선’을 지키고 지붕 위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었고 커다란 탐조등이 그 주변을 이리저리 비추고 있었다. 사코와 반제티는 교도소 신부의 ‘구원’을 정중히 거절하고 마지막 편지를 썼다. “친구들과 동지들, 이 재판의 비극은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이제 모두 한마음이 되십시오. 죽는 건 우리 둘뿐입니다. 우리의 이상, 우리의 동지인 셀 수 없이 많은 여러분은 살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슬픔, 우리의 오류, 우리의 좌절, 미래의 전투를 위한 그리고 위대한 해방을 위한 우리 열정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이 암흑 같은 비극의 시간 속에서 모두 한마음이 되십시오.”
엄청난 군중이 맨해튼의 유니언 광장에 모여들었다. “사코와 반제티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뉴욕 월드》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군중들은 크게 울부짖었다. 수십 군데에서 여성들이 기절해 쓰러졌고 어떤 이들은 옷을 찢고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람들은 서로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
두 이탈리아인과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뒷날 늘 이름이 붙어 다니게 되는 사코와 반제티는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고된 노동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니콜라 사코는 1908년 미국으로 건너와 공사장과 철공소에서 일하다 구두 공장에서 제화공으로 일했다.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도 같은 해 뉴욕으로 와 식당에서 접시를 딱고 공장에서 일하다 해고되어 생선 행상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두 청년은 휴일 오후가 되면 루이지 갈레아니를 따르는 무정부주의 조직 ‘그루포 아우토노모’ 모임에 나갔고, 무정부주의 신문《크로나카 소베르시바》를 구독하고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체포될 당시 반제티는 대중 집회에서 발언할 연설문을 소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심문 과정에서 무정부주의 동료들의 활동을 은폐했다.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도시 브레인트리의 제화공장에서 경리와 급여 수송원 두 사람을 살해하고 현금 가방을 빼앗아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 두 사람은 강도 살인자로 지목되어 체포되고 재판이 시작된다. “내 자유는 모든 이의 자유 속에 있고, 내 행복은 모든 이의 행복 속에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감옥에서도 ‘일하지 않는 두 손’을 부끄러워했던 두 사람은 노동자의 급여를 강탈한 강도 살인자로 둔갑한다. 재판장 웹스터 세이어는 ‘무정부주의 놈들’이라는 말을 내뱉고, 선정된 배심원들에게 ‘미국인이라는 애국심을 갖고 나라의 부름에 응한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공공연히 강조했다. 미국 사회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이탈리아인이자 무정부주의자에게 법은 공정하지 않았다. 공정하지 않은 재판정 분위기에서 증인들의 모호한 진술과 피고에 대한 유도 심문으로 일관한 심리 속에 명백한 증거가 없음에도 유죄 평결이 나왔고, 두 사람의 무죄를 입증하는 알리바이와 결정적인 증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친 피고측 변호인의 이의제기도 모두 기각되었다. 공정하지 않은 재판이라는 여론이 들끓게 되자 최종적으로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하버드대 총장 로렌스 로웰, MIT 총장 새뮤얼 스트래턴, 로버트 그랜트 판사로 구성된 3인위원회를 구성해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매사추세츠는 미국 탄생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던 뉴잉글랜드의 중심이었다. 위원회는 유죄를 다시 한 번 확정했고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법정의 권위는 지켜졌다. 감옥 안에서 사코는 단식투쟁을 했고 반제티는 자서전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쓰며 자신들이 무죄임을 항변했다. 반제티는 《뉴욕 월드》와 감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길거리에서 무시당하면서 내 삶을 살다 마쳤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고 이름 없는 실패자로 죽었을 것이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일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 마지막 순간은 우리 것이다. 그 고통은 우리의 승리이다!”사코는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울지 말거라, 단테야! 네 어머니가 일곱 해 동안 고생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아들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소중한 이들을 사랑하고 곁에서 보살펴 드려라. 네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들꽃을 꺾고 나무 그늘에서 쉬렴. 항상 기억해라.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 네 용감한 마음과 선량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 믿는다. 인생에서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거야.”
역사의 기억, 진실과의 대화
미국 법조계의 전설로 통하는 올리버 웬델 홈스, 클래어런스 대로, 루이스 브랜다이스 같은 법률가에서 미국의 첫 노벨 평화상수상자 제인 애덤스를 비롯하여 업턴 싱클레어, 유진 데브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같은 이들이 이 사건의 중심에서 저마다 역할을 했지만, 192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이틀 밖에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사코와 반제티의 시신 안치소에는 10만 명이 넘는 추도객이 줄을 이었고, 며칠 뒤 열린 장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