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그리움이 출렁인다>
그리움은 늘 모퉁이나 언덕배기 또는 마을 어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봇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눈부신 아침도 있을진대
언제나 해 질 녘
길게 그림자를 키우며 다가온다
혼탁하고 찝찔하고 묘한 향을 머금고는
거부할 수 없이 내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저 장정결제처럼 불쑥, 당당하다
아름드리나무 정강이에 둥근 옹이가
파고들던 숱한 미물들을 물리치고 가둬둔 수액의 응고이듯
기다림이 곧잘 쿨렁거리는 건
단단한 결정 속엔 아직 여린 액체가 있음이다
목적도 대상도 이젠 가물거리지만
여전히 어지럼증을 동반한 아득한 멀미
그 오래된 그리움이 또 출렁인다.
<어머니의 반짇고리>
풀린 솔기를 꿰매려 반짇고리를 열자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어머니의 시간, 곰삭은 숨이 격하다
대충 접은 광고지에 둘둘 감긴 시침실
마치 타래를 관통이라도 할 듯, 긴 바늘이 대각선으로 꽂혀있다
대못이다
어머니 가슴에 박힌 커다란 대못이 촘촘한 실 길에 걸쳐 있다
빳빳하게 풀 먹인 이불 홑청을 시칠 때 어머니 볼은 아직 붉었었다
바늘에 찔리면 연분홍 핏물이 봉숭아 물인 양
투명하게 떨어졌을 그 말간 손가락
누레진 시침실 가닥가닥 마다
피를 나눠 마신 듯 실과 바늘의 결의가 유별나다
바늘을 들어 어머니의 손등을 찔러보고 싶다
아직도 피가 나오려나
비닐 같은 저 손등에도 피가 도는지 늘 궁금했다
솔기를 감치다 바늘에 찔렸다
순식간에 입으로 가져가는 손가락
이 본능은 뭘까
피를 먹는다. 흡혈귀처럼 내가 내 피를 빨아먹는다
실타래를 타고 어머니의 피가 다시 수혈되고 있다.
<달항아리>
하현달을 빚을 때
상현달은 아직 태동하지 않았다
상현달이 다 될 무렵
갑자기 찾아드는 조급증
남은 것에 대한 조바심은
채워 본 자들만의 안달일진대
기운다는 것이 주는 공포
다시 채울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결국은 보름을 기다리는 건
너무도 잔혹한 고문이어서
상현과 하현을 기어이 덧붙여
보름으로 채우고야 마는
덧붙인 자리 교묘히 위장한들
도공이 이미 그 자릴 알고 있음에
언제든
둘로 나눠질 빚음에 기억들
항아리 속으로 두 달이 들어섰다
그를 너는 보름이라 부를 텐가
결국, 달항아리라 부를 수밖에.
날이 서다날카로운 칼날 끝에 내려앉은 먼지는 예각일 수밖에 없다간절함이 매정하게 팽개쳐질 때 등골의 서늘함도예상했던 결과, 벗어나지 않는 촉의 끝도 분명 날카로움이었다저 눈빛저 심장 모서리에 박힌 무수한 예각들둥근 끝은 어디쯤 가야 볼 수 있을까?어쩌면 원 안에 가장 날카로운 끝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날카로운 예초기에 잘린 잡초의 단면이 칼날보다 더 날이 서 있는 건마지막 숨들이 허공을 찔러대어
그 구멍 사이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때문일 것이다촘촘한 저 바늘구멍들 역시둥근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역시나 예리한 날이다더는 아침이 오지 않는 이의 저녁은 날이 겹겹이 포개진 판상절리여서멀리서 보면 판판하고 널찍해 지극히 평온해 보이지만
그 모서리 모서리마다 예리하게 날이 서 있음을 안다내 쉬는 숨들을 도형으로 그려낸다면 분명 예리한 송곳 모습일 것이다그 절실함 그 간절함, 모든 것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고자 하는
전과 다름없는 아침, 그 날카로운 예각의 빛 번짐이다.
<뒷골목엔 그늘이 깊다>
짓이긴 것들의 몸에선 수액도 아니오, 땀도 아닌
그렇다고 핏물도 아닌 그런 진득진득한 액체가 나오는 법
오지게 두들겨 맞고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것을 엉겁결에 목구멍으로 삼킨다
그것의 가미라는 것이 오로지 울분과 모욕감과 진저리 나는
그 어떤......
이럴 때 부대끼는 놈들은 죄다 도둑놈 같고
죄다 사기꾼 같다가도
작은 관심에도 모두가 친절한 사람 같아
어리둥절하며 애매한 표정을 짓다 이내 머쓱해 하고
판단력마저도 얇은 습자지로 짜부라들어
그저 입김에도 쉬이 구멍이 나고 찢기고 하는
참 지지리도 짧고도 얇은 분노
깊은 골목에는 분노 얕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명>
짝짓기에 실패한 매미 한 마리가
내 귓속에 자리를 잡았다
한이 깊었나
밤낮으로 울어대는 통에
이만저만 성가신 게 아닌데
어서어서 제짝 만나
이 비좁은 곳을 떠나주길 고대하지만
몇 년째 허사다
드디어 맞은편 귀에도
지난해 짝 찾기에 실패한 한 마리가 입주했다
옳다구나
둘이 눈 맞아 훨훨 날아가렴!
얼씨구, 해가 저물도록 울기만 하는 두 놈
저들 처지에 이상형 타령은 복에 겨운 일일진대
에잇!
인제 보니 두 놈 다 수놈이구먼.
<물의 뼈>
요란한 굴착기와 덤프트럭 소리가
물 위에서 파문을 일으킨다
철근이 박히고 콘크리트를 쏟아 부며
물의 뼈대를 세우고 있다
다리,
물의 다리를 이식 중이다
달리 보면 물의 척추이기도 한
바람의 다리일 수도 있고 땅의 의족일 수도 있는
또는 난간에 빗대어 서 있는 사람의 긴 다리이기도 한
저 하천은 하나의 다리를 더 가지게 되었으니 문어발이 됐다
물이 그 다리 밑을 감돌아 흐른다
생소함이란 것도 잠시일 테고, 태초부터 있던 것인 양
감도는 일쯤은 예삿일이 될 테다
맘이 욱신거린다
물의 뼈도 가끔은 욱신거리려나
어쨌거나, 물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된 거지?
<접시꽃>
무심하던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붉디붉은 얼굴을 부벼대며
생전 서로
설렐 것 같지 않던
덤덤함을 너머
무관심으로 길들어진 사이
그 흔한 익숙함을 앗아간
낯선 느낌이라니
설렘은 그렇게
낯설게 다가와
붉은색 치맛자락을 팔랑댔다.
<감나무 집>
담, 너 때문에
울안에 갇혀 산다 여겼었다
네 발밑으로
슬그머니 뿌리 내리고
밖으로 나가는 연습을 했다
너보다 크면 벗어날 줄 알고
해마다 키를 키우고
가지 뻗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너만 없으면
너만 허물면
나는 정말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이제야 네가 울타리고 바람막이고
기댈 수 있는 기둥임을 알았다
담 이지러지고
감나무 쓰러지던 날
땡감의 떫은 액체가
시멘트 바닥 위에 끈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