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연암 박지원!
입담 넘치는 이야기꾼으로 어린이 독자를 만나다
기행문 『열하일기』의 저자이자 조선 후기 실학과 문학의 거장 연암 박지원. 그의 『방경각외전』에 실린 대표적인 작품 세 편을 담은 『박지원의 전』은, 작가 연암을 장터의 이야기꾼으로 설정한 독창적인 액자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민옹전」에서 “제가 한때 우울증이란 몹쓸 병에 걸렸었단 말입니다.”라는 이야기꾼의 고백은 괜한 너스레가 아니다. 실제로 열일고여덟 살 무렵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박지원은, 병을 이겨 내기 위해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를 채집하여 글로 남겼다. 즉 작가 자신의 삶이 이야기꾼의 목소리 위에 고스란히 겹쳐 있는 셈이다.
보린 작가는 조선시대 판소리꾼과 전기수의 숨결을 그대로 불어넣은 구어체로, 연암 특유의 유쾌한 풍자, 해학의 온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어린이 독자에게 낯선, 한문 소설의 벽을 허문 이야기꾼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면, 시공을 뛰어넘어 느티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둘러앉은 청중이 되어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박지원의 전』은 단순히 원전을 현대어로 옮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연암 박지원이라는 거장이 독자들을 이야기 한복판으로 직접 초대하는 생생한 고전 책이다.
누가 가장 엉뚱깽뚱헌가?
아웃사이더들이 던지는 날카로운 통찰과 울림
『박지원의 전』은 영웅이 아닌, 개성 넘치는 아웃사이더들의 범상치 않은 삶을 통해 세상에 만연한 고정 관념을 통쾌하게 부서뜨린다.
양반 신분을 사려다 양반의 무능함과 허례허식, 백성을 수탈하는 폭력성까지 알게 된 정선 골 부자는, “나더러 도둑놈이 되란 소립니까?”라고 소리치며 죽을 때까지 양반이란 소리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본디 재산도 없고, 신분 또한 비천한 광문이는 오해와 진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묵묵하게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광문이의 “집이 있으면 뭐 해유.”라는 태연한 한마디는 진정한 소유에 대한 사유로 독자를 이끈다. 또한 사람의 참된 품격은 외모나 부,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 삶을 대하는 온화한 태도에서 은근히 배어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시종일관 능청스럽고 유쾌한 답변으로 좌중을 당황하게 하는 민 영감의 촌철살인은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통찰로 사고의 틀을 깨고,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 내는 치유의 길로 이끈다.
이처럼 비주류적 존재들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의 민낯을 통쾌하게 들추어낸 세 편의 이야기가 몇 백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들과 만난다. 엉뚱깽뚱헌 아웃사이더들의 당당한 삶이, 세상의 잣대나 남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도록 독자에게 단단한 용기와 위로를 건넬 것이다.
이토록 웅숭깊고 유쾌한 고전이라니!
옛 문학의 묵직한 정수를 세련되게 풀어낸 위트의 힘
“양반, 양 반! 개 팔아 두 냥 반, 돼지 팔아 석 냥 반, 소 팔아 넉 냥 반.”
양반은 양 반, 그러니까 한 냥 반! 개 판 값보다 적다는 거지.
“‘춘첩자’란 문(門)에 붙이는 글월(文)이니, 바로 내 성 ‘민(閔)’이구려. ‘방(?)’은 늙은 개를 뜻하니, 어이쿠! 내 욕이구먼. ‘제(啼)’는 운다는 뜻, 늙은 개가 울면 듣기가 싫지. 이것도 내 욕이네그려. 내가 나이가 들어 이가 다 빠져 소리가 새는 걸 놀리다니. 거참, 고약하네. 하지만 늙은 개가 무서우면, 개 견(犬) 자를 버리면 되고, 우는 소리가 듣기 싫으면, 입 구(口) 자를 막으면 되지 않나. 그럼 제(帝)랑 방(尨)이 남는데, 제(帝)란 조화를 부리고 방(尨)은 큰 물건을 가리키니, 이 둘을 붙이면 조화를 일으켜 큰 것! 오호, 바로 ‘용(龍)’이로구나. 그렇다면 이건 욕이 아니라, 내 칭찬을 한 것이로구나!”
_본문 중에서
『박지원의 전』에는 원작이 품은 고전 특유의 묵직한 문학적 장치들이 곳곳에 살아 있다. 양반의 무능함을 비꼬는 양반 노래, 매매 증서에 의도적으로 담긴 낯설고 어려운 어휘, 한자의 음과 뜻을 비틀어 해학으로 뒤집어 버리는 파자 놀이, 그리고 민 영감을 향한 깊은 애도가 담긴 추도문까지 결코 녹록하지 않은 옛 문학의 정수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유현진 작가는 유쾌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으로 고전의 무게는 덜면서 『박지원의 전』의 매력은 한껏 살렸다. 양반의 복잡한 허례허식을 ‘양반 매뉴얼’이라는 함축적인 이미지로 유쾌하게 풀어 내고, 한자를 직접 그려 넣어 말장난의 논리를 직관적으로 시각화 하는 등 글의 생생한 해학에 완벽하게 호응하는 위트 있는 그림을 녹여 낸 것이다. 이는 고전을 막연히 어렵다고 생각하기 쉬운 독자의 심리적 문턱을 크게 낮추어, 고전이 지닌 풍성한 결을 온전히 누리도록 돕는다.
독창적인 구성과 위트 있는 그림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를 만날 준비를 마친 『박지원의 전』. 지금 이야기꾼이 자리를 잡은 쌀가게 옆 느티나무 아래 그늘로 달려가 보자.
줄거리
「양반전」 신분의 한계로 억울한 일을 겪은 부자는 가난한 양반의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양반 신분을 사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군수가 작성한 문서에서 양반의 부당한 특권을 알아채고는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냐?”라고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광문자전」 종로의 거지 광문은 온갖 누명과 오해 속에서도 변명 대신 묵묵한 행동으로 신의를 증명합니다. 이를 통해 이름을 날리게 된 광문은 싸움을 중재하고 명기 운심을 콧노래만으로 춤추게 하며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려 살아갑니다.
「민옹전」 민 영감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인물입니다. 마음이 병든 ‘나’에게 기지를 발휘하여 잘 자고 먹을 수 있게 도와주는 한편, 부패한 탐관오리를 곡식만 축내는 메뚜기에 비유하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