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시인의 말 ]
잃어버린 말들을 꺼내봅니다.
마음에 오래 담아 두었던 기억들에
온기를 담아
다시 길 위에 서 봅니다.
때로 흔들리겠지만
걸음 멈추지 않겠습니다.
2026년
엄하경
추천사
엄하경의 시에는 기교나 수사보다 순결성과 정직함이, 아이 같은 감수성으로 작고 연약한 대상을 만나는 투명한 마음이 살아 있다. 비하하고 조롱하는 말의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면서 만난 엄하경의 언어에는 깊은 슬픔과 토로할 수 없는 상처가 조용히 숨어 있다. 삶이라는 내적 대지를 딛고서 저 환상 같은 이미지에 자아를 접속한 엄하경의 시적 수행은 언제나 현존에 기반한 것이다.
- 김효숙 (문학평론가)
책 속에서
<시온에서 길을 잃다>
겨울이 와도 철새는 보이지 않네
돌아오지 않는 철새처럼
그때의 나는 어디에도 없네
발목 잘린 기억들이 하굿둑 아래
흐르지 못한 물길 위, 부유물로 떠 있네
낙동강 칠백 리 흥건히 적시던 핏빛 노을은
미세먼지에 가려 흐린 물감처럼 번져가네
칼바람 흔들던 갈대밭 위로
화들짝 날아오르던
고니 청둥오리 저어새 흑두루미
이제는 찾아올 곳을 잃었네
듬성듬성 남은 갈대 길 버려진 과자봉지에
비둘기들이 코 박고 부스러기를 쪼고 있네
아득하여라 자취도 없이 사라진 시온 섬
샛강 나무다리 건너며 손가락 걸었던
더운 피 청춘들의 뜨거운 약속,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늘어선 고층아파트 옥상 위에
갈 길 잃은 손톱달로 걸려 있네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밤이다
당신들의 밤은 낮보다 길어
독술을 연마하기에 딱이다
혀끝 벼려 필살기 준비하는 당신
오늘의 표적 찾아 모니터를 노려본다
매의 눈과 신박한 독설만으로
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기에
이 전쟁은 아주 경제적이다
묘수가 떠오르지 않을 땐
다른 동맹의 현란한 독설에
‘좋아요’만 신나게 달면 된다
컵라면 식은 국물 들이켜며
치명적인 독을 골라
신속하게 날릴 준비 끝냈을 때
드디어 표적 하나 접수한다
여기저기 마구 찔러 보다
마지막 일격!
목표물이 스러졌다
단지 몇 번 찔렀을 뿐*
이라 중얼거리며
당신은 증거인멸 중인데
여린 꽃잎, 상처 많은 꽃들이
막힌 출구 앞에서
소리 없이 지고 있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문득, 밤하늘에 떠 있는 환한 달을 보고
아! 탄식할 수 있도록
누군가 날마다 새로 만든 달
하늘에 띄우고 있다면
박하 향 싸한 가을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포근한 구름이
몽실몽실 양털을 깎아
하늘로 날려 보낸 거라면
조각배 위에서 모닥불을 피워
아버지와 단둘이
아무런 불화도 갈등도 없이
갓 잡은 송어 도란도란 구워 먹을 수 있다면
잠든 나 가만히 내려다볼 수 있다면
내 꿈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언제나 해피 엔딩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면
수많은 나 차례로 끄집어내서
그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어볼 수 있다면
헬륨 풍선 쥐고 허공에 한 발 내디뎌도
추락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면
아, 그보다
전시장 나서면서도
그 싱싱한 상상
놓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