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우리는 때때로 한 권의 시집 앞에서 독자가 아니라 순례자가 된다.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오래된 별의 숨결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엄학섭의 시도는 바로 그러한 드문 미학적 체험을 안겨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이 시집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익숙한 현실의 문법으로부터 천천히 이탈한다. 언어는 부서지고, 시간은 거꾸로 흐르며, 죽은 별들은 국밥 김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장터의 질화로와 우주의 특이점이 한 곳에서 서로를 껴안고, 눈 내리는 보성의 골목 어귀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태평소를 분다. 엄학섭의 시는 흔히 말하는 난해시의 범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해독 이전에 먼저 ‘앓게 되는 시’다. 의미보다 먼저 울림이 도착하고, 개념보다 먼저 떨림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이 낯선 음향들은 단순한 조어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언어가 되기 이전, 태초의 숨결과 떨림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우주가 막 생성되던 순간의 원초적 파동이 남도의 입말과 뒤섞여 다시 살아나는 듯한 감각을 준다. 시인은 언어를 단순한 설명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언어를 살아 있는 진동체로, 존재를 흔드는 파장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우주꼬뺑구 꿈꿈밝밝』은 읽는 시집이기 이전에 들리는 시집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온몸으로 통과하는 시집’이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이 작품이 가장 첨단의 우주론과 가장 오래된 인간의 슬픔을 한 장소에서 화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초끈이론, 블랙홀과 다중우주의 개념들은 보통 차갑고 무정한 수식의 세계로 이해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을 어머니의 젖은 행주치마와 장터 국밥집의 김 속으로 기어이 데려온다. 이 한 줄 속에서 우주는 더 이상 멀리 떨어진 추상의 공간이 아니다. 우주의 떨림은 인간의 눈물과 연결되고, 별빛의 붕괴는 가난한 부모 세대의 침묵과 포개어진다. 시인은 과학을 인간의 체온 속으로 귀환시키며, 동시에 가장 토속적인 삶의 풍경을 우주적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그리하여 전남 보성의 장터는 단순한 지방의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무대가 된다. 질화로의 숯불은 별의 심장이 되고, 막걸리 사발은 은하의 순환이 되며, 깨복쟁이 친구와 나누는 ‘한 잔의 꿈꿜리’는 존재 전체를 위로하는 우주적 성찬으로 변모한다. 우주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문장조차 소멸하는 순간에도 시인은 끝내 새로운 첫 문장의 탄생, 즉 새로운 꿈의 이야기(화·話)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태초의 입구가 된다. 이러한 영원회귀의 사유는 동양적 순환 세계관과 현대 우주론적 상상력이 만나는 가장 독창적인 성취라 할 수 있다.
우주의 생성과 붕괴를 모두 지나온 뒤에도 시인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눈 내리는 고향 주막의 등불 아래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시인이 끝내 구원하려 했던 것은 아득한 우주 자체가 아니라, 그 우주 속에서 떨며 살아가는 인간의 외로운 영혼이자 그들이 꿈속에서 나누는 애틋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시란 결국, 상처 입은 우주를 어루만지는 인간 영혼의 가장 오래된 별빛 이야기라는 사실을 웅장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이동순의 <작품 평론> 중에서
해맑게 웃는 아이와 같은 순수함
고집스럽게 난해의 벽을 쌓아 올리는 예술가
이방인을 환대하는 친절한 촌부
삶의 내력을 통찰하는 관대한 장부
시인 엄학섭은 이런 현현을 통해 세상에 질책과 사랑을 동시에 전하고 있다.
-강정훈의 <작품 평론> 중에서
엄학섭의 언어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자리를 갱신하고 있습니다. 치열함으로 만들어진 결은 이미 하나의 형식을 이루었고, 그 형식은 다시 삶의 결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말은 여전히 흙의 기억을 품은 채 낮은 음으로 흐르고, 그 흐름은 멈추지 않습니다.
문장은 끝을 향하지 않고 다른 자리로 옮겨갑니다.
읽는 이는 그 자리에서 오래 머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온도의 흔적입니다.
-이영식의 <작품 평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