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유리창에 와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름다워 숨이 멈추었다. 그런 찰나의 황홀함이 시 아닐까. 헛되이 너를 사랑했다.
출판사 편집자의 글
『헛되이』는 최영미 시인이 2019년 설립한 이미출판사에서 펴내는 10번째 책이다. 표지 사진도 최 시인이 찍었다. 이 책의 편집과 배치는 재일한국인 시인 정해옥이 번역해 2026년 5월 일본에서 출간한 최영미시선집『詩を?し野にゆく』(시를 밝혀 들로 나서다, 港の人)를 참고했다.
1994년 간행된 첫 시집에 실렸던 시「Personal Computer」의 마지막 행 때문에 편집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 일반 독자는 물론 문학을 업으로 삼는 문인들에게도 더러 오해받았던「Personal Computer」를 시선집에서 빼려고 했으나, 그런 오해는 어쩔 수가 없으며 AI 시대를 예고한 상징적인 작품을 빼면 안 된다고 판단해 책에 넣었다. 최영미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서툰 사람이다.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출간 뒤 시인은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고 싶어「Personal Computer」를 썼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한번 보자, 는 심정에서 ‘Personal’이라는 단어를 시의 제목에 넣었고 1990년대 컴퓨터의 명령어들을 시에 삽입해 기계문명에 대한 풍자를 시도했다.
진하게 강조한 마지막 행은 시인의 의도된 장난이었다. 여성들에게 얌전한 언어를 강요하는 사회를 의식해 그런 표현을 쓴 것이나, 쌍ㅅ이 들어가는 말이 주는 충격이 커서, 그 앞에 나온 좋은 표현들이 묻힌다는 지적을 듣고 문제의 행을 시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책 속으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중에서
“너의 젊은 이마에도/ 언젠가/ 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중에서
“혁명은 이제 광고 속에만 있다”
---「지하철에서: 노란 10월」중에서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의 여행」중에서
“같이 있으면 잠을 못 자/ 곁에 없으면 잠이 안 와”
---「연인」중에서
“세상이 갖고 놀다 버린 햇빛 한줌// (…) 나는 당신의 시간을 갖고 싶어/ 당신을 바라보던 / 그 남자의 눈빛을 갖고 싶어”
---「My Bed」중에서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중에서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독이 묻은 종이」중에서
“한 번 싸워보지도 않은/ 4월과 5월에 찬사가 쏟아지고/ 아픔을 모르는 5월이 봄을 대표해 상을 받는다// 5월 천하, /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사라진/ 3월의 명복을 비는 이는 없다”
---「3월」중에서
“엉망인 세상을 내 손으로 정리할 순 없지만/ 수건은 내 맘대로 접을 수 있지//(…)/ 사나운 고기를 싸는 상추 잎처럼/ 순하게 살아온 당신”
---「수건을 접으며」중에서
“내가 칼을/ 다 뽑지도 않았는데/ 그는 쓰러졌다/ 그 스스로/ 무너진 거다”
---「팜므 파탈의 회고」중에서
추천평
최영미의 시는 벌거벗은 검투사의 창처럼 위험하다. 계산이나 사교나 속도에 길들지 않은 호흡으로 위선이 숨을 곳을 차단한다. 예측 불허의 표현과 자유로운 사고의 좌충우돌 속에 온몸을 던져 쓴 새 시집을 펼친다. 자신을 치열하게 드러낸 시와 외로운 삶의 우박들이 시린 상처처럼 솟구친다.
- 문정희 (시인)
“최영미는 젊은 시절에 위험을 감수하고 체제에 저항했던 것과 똑같은 열정으로 현재 자신의 삶을 증언하는 시들을 써왔다. 그녀의 시는 억지로 만든 조형물이 아니라, 삶으로 쓴 시들이다. 우리는 최영미의 시에서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사회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험스런 모험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스타일은 그녀의 독립성이다.”
- 제임스 킴브렐 (시인,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교수)
최영미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이유를 구현한다.
- 유종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