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스트레스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영어 단어시험을 준비하던 어느 날, 식은땀이 줄줄 나고 앉아 있기조차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복통이 찾아왔다. 대학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까지 했는데 ‘스트레스성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푸르른 시간들을 저당 잡힌 채 기숙학원에 갇힌 수많은 청춘들이 두통, 요통, 복통, 만성피로 등 크고 작은 온갖 증상들로 통받고 있었다. _ 박지희 〈나는 입시 스트레스를 견딘 생존자입니다〉
해방 이후 산업화 시기 학교는 규율과 훈육을 통해 시간을 지키고, 줄을 맞추고, 지시를 따르는 학생을 만들었다. 산업사회가 요구한 성실하고 생산적인 몸이었다. 당시 문제가 있는 학생은 교사가 고쳐야 할 ‘문제아’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행동·정서·학습의 어려움이 ADHD, 우울장애, 불안장애, 학습장애와 같은 진단명으로 재구성되었고, 교정의 주도권은 점차 교육에서 의료와 상담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오늘날 의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 약물과 생명과학 기술로 몸과 마음을 더 나은 상태로 최적화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아픈 사람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에서 ‘정상인 사람도 더 집중하고 더 높은 성과를 내도록 강화하는 것’으로 이동한 셈이다. _ 김희정 〈누가 아이들의 고통을 병으로 만드는가〉
사춘기의 뇌는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건물과 같다. 감정과 보상에 반응하는 회로는 일찌감치 공사가 끝나 활발하게 돌아가는데, 충동을 조절하고 장기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공사는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마무리된다. 또래의 인정에 어느 때보다 목마르고, 자기 정체성이 아직 말랑말랑한 이 민감한 시기에, ‘좋아요’의 개수와 팔로워 숫자로 나의 가치가 실시간 채점되는 환경에 놓인 것이다. _정오봄 〈아이들의 우울, SNS 때문일까?〉
죽고 싶다며 청소년이 찾아온 날, 사실은 엄청 긴장했다. 바들바들 떨며 내 앞에 선 아이에게 뭘 어찌 해주어야 할지 몰랐지만, 의연한 척 최선을 다했다. 진심으로 아이에게 세상의 다정함을 전하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떨치려고 가깝지도 않은 어른에게 손을 내민 용기가 실은 누구보다 잘 살고 싶다는 신호처럼 읽혔다. 아이들이 외롭게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도록 그 곁에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AI가 24시간 친절하게 상담에 응하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사람과 연결될 때 위로받고 살아난다. _ 장희숙 〈청소년 자살, 숫자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
돌 틈에 핀 풀꽃도 기를 쓰고 꽃을 피우듯이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꽃피우고 싶어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어 한다. 뿌리를 깊이 뻗을수록 가지를 넓게 펼칠 수 있다. 가정과 학교, 마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장으로 아이의 삶에 안정감을 주고 도약할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토대가 되어준다. 모든 생명체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철새들 또한 계절에 따라 사는 곳이 다를 뿐, 뿌리를 내리고 산다. 뿌리와 날개는 함께 자란다. 아이들이 뿌리를 내리고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이다. _ 현병호 〈각자도생 사회와 공생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