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반골 기질과 비판적 정신의 소유자, 페터 주어캄프
페터 주어캄프는 1891년에 북부 독일 올덴부르크 인근의 시골 마을 키르히하텐Kirchhatten에서 평범하고 소박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농부가 되길 바랐으나 독립하여 스스로 학업을 통한 지성인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는 1차 대전에서 무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고, 비커스도르프의 대안학교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연출가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성공한 분야는 출판계에서였다. 1932년에 S. 피셔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업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4년에 설립자인 자무엘 피셔가 사망하자 그의 사위인 고트프리트 베르만피셔와 함께 출판사를 공동으로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2차 대전 중에 나치로부터 “대역죄” 혐의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어 비참한 수용소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건강을 크게 해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폐 질환으로 시달려야 했다. 전후 1945년에 그는 베르만피셔와 결별하고 주어캄프 출판사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이때에 헤세와 브레히트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의 출판사로 옮겼다. 이후 주어캄프 출판사는 독일과 유럽의 유명 작가들의 책을 출간하면서 서독 최고의 출판사로 성장했다.
전후에 그가 출판사를 통해 이루어야 할 사명은 매우 시급한 것이었다. 작가들은 나치에 부역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은, 나치 문화와 단절하고 비판적 지성을 지닌 출판인과 출판사가 필요했다. 여기에 페터 주어캄프와 그의 출판사가 완벽히 부응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출판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신뢰와 연대의 공동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치에 굴복하지 않고 작가의 자유를 지키는 출판 정신을 보호했다. 이른바 “주어캄프 문화”라 불리는 출판사와 작가의 정신적 공동체는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페터 주어캄프는 그의 출판사를 통해 작가들의 공동체와 더 나아가 독일 지성계의 복구, 지적 전통의 보존과 재구성,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글쓰기 실험 등을 통해 새 시대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패전 후 방향을 잃은 독일 국민들에게 유감없이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들의 진정한 친구이자 후원인, 페터 주어캄프
그는 작가들에게 외부의 이데올로기나 시작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작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한편, 서두르지 말고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과 고뇌를 아끼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한 일시적인 유행이나 상업적 성공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예술적 양심과 기준을 지키도록 당부했다. 그것이 작가와 출판사 양측의 명예와 임무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막스 프리쉬에게 그는 “시장의 논리에 흔들리지 않도록 방패가 되어주었으며, 우리가 실패할 권리를 가질 수 있게 지켜준 보호자”이기도 했다. 그는 막스 프리쉬에게 장면들의 연결이 훌륭하고, 짧은 대화는 투명하게 빛나고, 긴 대사는 적절히 압축되어 있고, 후렴구는 서정적이며 극적 효과를 낸다는 비평가의 시선으로 독려한다 (129쪽 참조) 그는 독일 문학사의 빼어난 번역가인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가 생계에 곤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인이기도 했다 (74쪽 참조).
(지금은 독일 문학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마르틴 발저라는 신진 작가의 책을 발간하고서 “서랍 속의 원고들이 시대의 공기 속으로, 문학 비평의 바람 속으로, 그리고 더 넓은 독자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고 “(비평가들의) 문학적 논의에 들어섰다”고 격려한다. 그런가 하면 마르틴 발저의 유머를 카프카의 유머와 비교하며 “빛나는 가능성으로 열릴” 것이라고 극찬한다 (211, 215, 216쪽 참조). 확신이 없는 신인 롤프 베커에겐 “이 소설은 반드시 완성되어야 합니다”라며 용기를 북돋는다 (160쪽 참조). 그는 베커에게 “첫 책은 사실상 하나의 세계를 예고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조언을 한다 (164쪽 참조)
그런가 하면 페터 바이스와 같은 대작가에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원고는 지금 상태 그대로는 출판될 수 없다”고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99쪽 참조). 무분별한 “독일식 유머”를 저지르고(!) 스스로 뿌듯해하는 에른스트 펜촐트에겐 그런 작위적 기교야말로 예술 전반에서 가장 나쁜 오류이며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비판한다 (169쪽 참조).
이렇게 그는 한국 면적의 네 배가 넘는 독일 전역에 흩어져 거주하는 작가들과 편로 소통하며 수준 높은 비평, 아낌없는 조언, 참신한 제안, 든든한 후원을 하며 패전 후 무너진 독일 출판계와 지성계를 재건하는 방향과 정신을 담은 책을 출판해야 하는 사명을 훌륭히 완수했다. 그는 기존 작가들을 모아 소설, 희곡, 시, 철학, 사회과학서를 쓰도록 격려하고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여 책을 최상의 상태로 출간하면서 출판계를 성장시켰다. T. S. 엘리엇의 찬사처럼 문학에서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으며 문학의 고귀함을 품위 있게 지켜낸 발행인이었다.
지금 페터 주어캄프의 편지를 읽는 이유
그의 편지에는 진실한 호소, 날카로운 비평, 따뜻한 배려, 솔직하고 우아한 예의, 작가들에 대한 존중이 배어 있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비평 문학의 성취와 아포리즘도 놓칠 수 없다. 그는 만프레드 하우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어는 탐색하고 문장은 질서를 세웁니다. 의미는 말로 선언되지 않고 날카로운 선들로 투명하게 그려진 도형 속에서 사물처럼 드러납니다.”라는 철학적 사색이 담긴 명언을 남긴다 (121쪽 참조).
이 책은 당장에는 출판인, 편집자, 마케터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진심과 안목이 담긴 편지여야 작가를 설득하고 한층 높은 수준의 책을 출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책을 낼 때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듯하다. 글쓰기의 전범이 사라진 지금, 독자들 또한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메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남을 설득하는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좋은 지침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헤세는 주어캄프 출판사의 수석 편집자이자 훗날 경영인이 되는 운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출판인은 ‘시대와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시류를 따라가면 안 된다. 시류가 품위가 없는 경우 시류에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한다.” AI 만능인 지금 이 시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들뿐만 아니라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넘어서 정체 모를 시류에 영합하도록 종용하는 책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어떠한 출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지, 그리고 출판의 영원한 책무가 무엇인지 이 책은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 책은 루카치, 토마스 만, 괴테, 헤세, 카프카, 레마르크, 한트케 등의 독일 문학 거장들의 저작을 번역해온 번역가 홍성광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진중하고 과장되지 않는 번역을 통해 페터 주어캄프의 원문이 빛을 발한다. 더불어 독일 문학에 대한 정통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꼼꼼한 주석을 읽는 것만으로도 전후 독일 문학사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면모를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추천사
그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자 형제다. 그는 나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견뎌냈으며 내 작품의 본질을 가장 깊게 이해했다.
- 헤르만 헤세
친애하는 주어캄프 귀하, 저는 진심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귀하가 이끄는 출판사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는 뜨겁게 문학을 사랑했고, 문학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랐으며, 문학의 앞날을 열어준 문학 그 자체였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키
그는 우리에게 단순히 원고를 받아 책을 찍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시장의 논리에 흔들리지 않도록 방패가 되어주었으며, 우리가 실패할 권리를 가질 수 있게 지켜준 보호자였다.
- 막스 프리슈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지 깨달았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그는 문학에서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유럽 전체를 통틀어 그만큼 문학의 고귀함을 품위 있게 지켜내는 발행인을 보지 못했다.
- T. S. 엘리엇
그의 독서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읽는 법”을 배우게 된다.
- 막스 니더레히너
사적인 삶과 정치적 격랑, 문학적 모험 속에서 길러진 그 편지들은, 마치 번개와 벼락을 스스로 끌어안음으로써 타인을 그 위험에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듯 살아온 한 인간의 증언이었다.
- 지크프리트 운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