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초록 머리가 건네는 안부>
인형의 머리에 푸른 머리카락이 돋았다.
“안녕?”
책상 위 물컵에 올라앉은 잔디 인형이 인사를 건넨다. 갈색 헝겊 뭉치 같은 인형 정수리에서 파릇한 싹이 배죽배죽 돋아나다니, 눈이 번쩍 뜨인다.
발목 스타킹 앞부분에 넣었던 잔디 씨가 톱밥을 딛고 며칠 만에 존재를 드러냈다. 씨가 든 쪽을 머리로 하여 털실로 눈, 코, 입 모양을 만들어 붙였을 때만 해도 인형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어설픈 모양새였다.
그새 잔디 씨가 내민 연둣빛 촉들이 모여서 인형의 머리칼이 되었다. 푸른 머리 인형이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댄다. 민머리 때와 사뭇 다른 생기발랄한 모습에 마음이 다가간다.
창문으로 스며든 빛과 물 한 컵만으로도 살아 숨 쉬는 인형의 기운이, 내 마음에 선명한 빛깔로 머문다. 변화라고는 머리카락이 난 것뿐인데, 인형의 얼굴엔 활기가 돌고 표정이 살아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아프다고 말할 것 같다.
“어, 어, 그래, 안녕?”
알아듣는다고 여기며 나는 반려견에게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상하게도 빼곡하게 돋아난 연둣빛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인형이 내게 전하는 한마디 한마디의 다정한 속삭임으로 들려온다. 초록빛 숨결로 내게 말을 건네는 순간, 잔디 인형은 이미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다가왔다.
머리카락이 나서 자란다는 그 사소한 변화 속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태동을 본다. 인간이 잘 자라는 존재에 본능적으로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이처럼 자라나는 모든 생명의 신비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잔디 인형이 심리와 정서 등 치유 측면에 효과가 있다는 점에 관심이 있었다. 이번에 치유농업 프로그램에 참여해 잔디 인형 만들기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잔디 인형에 물을 주며 잔디가 자라는 모습에 관심을 두다 보면 심리적 안정과 작은 성취감이 생긴다고 한다. 자신도 다시 자랄 수 있다는 의지를 싹트게 하여, 낙담하거나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변화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 잔디 인형이 또렷이 더 가까이 다가온 이유도 그 때문인가. 요즘 들어 마음이 오목하게 가라앉는 날이 잦았다. 마치 내 삶의 부피 자체가 조금씩 쪼그라들어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초록 머리를 가만히 응시한다. 내 마음 한구석에도 작은 씨앗들이 들어있었나. 긴가민가한 꼼틀거림이 느껴진다.
삶이란, 형태를 바꾸며 지속되는 성장이라고 했던가. 치유농업에 대해 배우며, 미미하게나마 내 마음이 반응하는 작은 움직임을 마주한다. 그곳에는 날마다 자라는 마음의 정원사가 살고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치유라는 이 가느다란 느낌이, 치유농업을 펼쳐나가는 일에 든든한 마중물이 되리라 기대한다.
잔디 인형이 밀어 올리는 푸른 안부에 귀를 기울여 본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줄어든다는 게 아니야, 삶은 매일 자라고 있으니까.”
비록 느릿할지라도 지금 내 어딘가에서는, 무언가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무성하게 자라던 시절을 한참 지나온 것 같은데, 나만의 시간으로 계속 자랄 부분이 있다니. 뿌리가 점점 깊어진다는 말일까? 어쩌면 오랜 시간 다져온 내면에서 마침내 나만의 꽃을 피워낸다는 뜻인가?
느림도, 늦음도, 때로는 멈춤조차도 저마다의 삶이 자라나는 하나의 방식이라니.
잔디 인형의 말들이 내 마음으로 파릇파릇하게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