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당신이 떠난
의자 그림자에서 여러
개의 미래가 태어난다
폭발하지 않고
생기는 시간은 없어서
가끔 모서리에 떨어진다
나는 신발을 집에 두고
집을 던져 버린다
2026년 가을
유승영
책 속에서
너와 내가 바뀌고 나와 네가 바뀌면 미국에 갈 수 있다 미국으로 간다면 반짝이를 붙인 채 미국으로 간다면 손톱은 글루 건이 필요한데 손을 씻을 때는 잠시 떼어 놓아야 하는데 손톱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아직 가 보지 못한 나라
각질과 각질을 붙인 채로 나의 손톱은 날마다 변하는데
말끔하고 시원하게 불완전하고 너덜거리게 불투명하고 산뜻하게 갑작스럽고 어색하게 긴밀하고 창백하게 화끈하고 화사하게 아프고 사랑스럽게 두근거리며 후련하게 매혹적이며 유쾌하게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까칠하고 충만하게 홀가분하고 희망차게 왕성하며 흐뭇하게 긴장되며 만족스럽게 지루하며 완벽하게 눈부시며 평범하게 우아하며 경솔하게 재치 있고 믿음직하게
뒤바뀐 손톱은 미래를 바꾸고 옷을 바꿔 입은 우리는 손톱을 바꾸고 애인을 바꾸고 얼굴을 바꾸고 거꾸로 된 세상에서 뭐든지 바꿀 수 있어 아직 가 보지 않은 나라 감쪽같이 살아남은 우리들이 있잖아
---「미래가 태어나려면」 중에서
말씀은 모자를 쓴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가 부러웠다 그런 여자라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쎄, 태초는 미묘한 부스러기 같아서 빛이 저물지 않는 어느 여름날 말씀은 아이를 등에 업고 아이가 얼굴을 묻을 때마다 검은 잉크가 배어 나와 검은 그림자를 빼앗기고 마는 것
말씀이 자꾸만 공원에 가는 이유처럼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면 어제의 다짐을 더 잘 기억할 수 있다 늙은이는 젊은이를 찬미하고 젊은이는 늙은이를 저주하는데 경건한 손바닥에 귀 기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누가 뭐래도 우리는 잘 도착했어
기차가 왜 오지 않았는지 좋은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짐짓 턱을 끌어당긴다 오늘의 말씀에게 입을 맞춘다
---「예배」 중에서
듬직한 어깨 뭉툭한 두 발
무엇이든 걸리면 걸어가는
오늘은 벗은 채로 옥상에 있기로 해
마늘 단이 걸려 있는 옷걸이
옷걸이를 보고 있으면
한겨울에 엄마한테 쫓겨났던 일이 생각나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잘못했다고 말하기 싫었거든
늦은 커피는 통쾌하고
오늘의 생각을 걸어 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천근만근의
어디에든 옷걸이가 있어
마치 망설임처럼
---「어떤 옥상이 있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