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작가 백재민, 정치논객 백재민은 이제부터다
"이 저자에게는 간판이 없다." 원고를 처음 받았을 때 편집부의 판단은 이랬습니다. 저자를 정치인이라 부르기에는 이력이 짧습니다. 지방의 작은 정당에서 청년위원장을 지냈고, 통장이 바닥나 그만뒀습니다. 당선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원고는 달랐습니다. 18장은 스웨덴의 살트셰바덴 협약을 근거로 평등이 생산성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합니다. 19장은 사회복지사의 처우를 다루며 사명감이 임금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짚습니다. 21장에서는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에서 스스로가 미헬스가 말한 관료였다고 적습니다. 24장은 좌파가 거대담론을 자기 검열의 금기로 취급하는 동안 그 자리를 누가 차지했는지를 묻습니다. 논조와 통찰과 연민과 제언이라는 말을 편집부가 붙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고 안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저자가 정치논객으로 불릴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와, 세 번의 중퇴로 남은 이력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누구에게 말할 자격을 주는지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이 책 16장이 다루는 주제입니다. 출발선이 다른 경주에서 결승선의 순위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저자는 자신이 그 경주의 한 사례라는 사실을 알면서 이 원고를 썼습니다. 편집부가 이 책을 내기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저자 스스로 맺음말에서 미헬스의 철칙을 깨는 방법도, 사회민주주의를 완성할 답도 아직 갖지 못했다고 적어두었습니다. 다만 시대를 견디는 힘과 시대를 읽는 눈은 다른 것이고, 이 책에는 후자가 있습니다. 노력이 부족해서 졌다고 여겨온 사람에게, 그리고 정치와 인생이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책 속에서
통장 잔고가 16,200원이던 날,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게 5,500원짜리 음료수를 사드렸다. 전 재산의 삼분의 일이었다. 음료수를 건네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아메리카노가 더 싼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뿌듯함보다 쓴맛이 남았다. 어떤 이의 생활고는 그 사람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 머리말 중에서
새벽 다섯 시에 자기계발서를 읽는 사람과 새벽 다섯 시에 유인물을 인쇄하는 사람은 같은 시간을 다른 방향으로 쓴다. 이 사회는 전자만 '노력'이라 부른다. 출발선이 다른 경주에서 결승선의 순위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 제3부 지금 이곳에 중에서
뒤늦게야 알게 됐지만 문제는 내가 바로 정당론에서 언급되는 관료였다는 점이다.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민주적 절차를 사유화한 셈이다. ― 제3부 지금 이곳에 중에서
좌파가 거대담론을 자기 검열의 금기로 취급하는 동안 우리 몫만 줄었다. 좌파가 거대담론 앞에서 멈칫거리는 사이, 우파는 이미 다음 위기의 서사를 쓰고 있다. ― 제3부 지금 이곳에 중에서
배고픔이 가난인 줄 알았는데, 배는 라면으로도 채워지더라. 가난은 남에게 베풀 선의 앞에서 통장잔고와 내일 점심메뉴와 이번 주 담뱃값이 한꺼번에 뇌리를 스치는 일에 가깝다. ― 종장 남은 몫 중에서
그람시의 노트는 그의 굽은 등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 이 책의 분석 틀이 됐다. 성공한 패배는 후대에게 건네지는 과제였다. 실패한 선례라도, 그 선례는 다음 사람에게 표본을 남긴다. ― 맺음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