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세계적인 여류작가들에게 글을 쓰는 이유를 물었는데 재미있는 표현이 많았다.
“글쓰기는 사랑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술과 애인 때문이에요.”
“글을 쓰는 것은 개인적인 일로,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존재한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튼튼한 책상과 타자기 외에는 필요한 게 없다고 말한다.
하루 일과를 펜촉으로 꾹꾹 눌러 쓴 학창 시절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물질의 쓰레기는 때마다 버리면서 정신의 쓰레기는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 많다. 글쓰기는 내 정신을 정리하고 비워 내는 일이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나오는 글이다. 죽으면 다 없어지지만, 자신의 글은 책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끝까지 살아남는다고도 한다.
잊힐까 봐 글을 쓸까. 흔적을 남기려고 글을 쓸까. 나는 죽은 다음 글이 살아남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살아 있을 때 그 값어치만큼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냈을 뿐이다. 나에게 쓴다는 것은 ‘내 존재를 느끼고, 돌보고, 죽음 이후까지 이어질 내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쓰는 것 같다.
죽은 다음에 세상의 영광이 죽은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 있을 때 진심으로 살아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일은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기에 삶이 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긴 글은 가족과 다음 세대에 알
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글은 주인공이 모두 자신이다. 허구가 아니다. 그녀의 독특한 글쓰기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다섯 시에 일어나 타일을 붙이는 내 어머니 덕분에, 몇 푼의 이득을 챙기면서 세금 신고를 하지 않은 어머니 덕분에 그 부르주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비가 와도, 해가 쨍쨍해도, 두 강 사이를 건너는 뱃사공이었다. 내가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건너도록 도와준 뱃사공. 어쩌면 그의 가장 커다란 자부심, 아니 심지어 그의 존재 이유는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
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이 헛되이 살지는 못할 것이다. 글쓰기는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깨우치는 일이다. 하긴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위해 뱃사공이 되어 주고 싶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이 건널 수 없는 강 너머 더 나은 세상으로, 딸이라도
건너게 해 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것으로도 그의 삶은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딸은 그 경험을 많은 책으로 남겨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했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왜 글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사람에게는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여 보존하고 싶은 내적 충동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이집트를 여행하며, 어두컴컴한 동굴 속, 파라오들의 무덤에 빽빽이 그려진 그림과 수많은 상형문자를 보며 생각했다. 인간은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충동에 의해 문자가 나왔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살아오며 많은 놀이를 즐겨 보았다. 그중 평생 함께해 온 것은 클래식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이런 놀이는 언제나 나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조금씩 더 성장해 왔다.
네 번째 책을 낸 이후 오래 작품을 쓰지 못했다. 그 수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메모해 둔 것이 동기가 되어 다시 책을 낸다. 존재의 이끌림에 따라 펜을 들었고, 삶의 진심을 온전히 쏟아 내었다. 살아 있는 한 이런 진지한 놀이는 계속해 보고 싶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인가
수년 전 코로나가 창궐하던 팬데믹 시절, 집 밖을 못 나가던 암담한 시기였다. 어느 날 유럽의 한 첼리스트가 지붕 위에 올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매력적인 첼로 선율이 들리자, 사람들이 하나둘 창문을 열고 그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예요.”
아름다움이 우리 영혼을 얼마나 고양시키는지. 그러나 세속의 인간은 아름다움을 동경할 뿐, 그런 인간이 되도록 실천하려는 노력에는 인색하다. 그럼에도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에 속하는 것들과 맞닿으면 우린 감동하게 된다.
나뭇잎의 작은 흔들림, 봄바람에 흩어지는 벚꽃 잎, 키 작은 여린 채송화, 치맛자락 나풀거리며 뛰어가는 어린 소녀의 몸짓. 우리 일상에 흩어져 있는 아름다움은 끝이 없다. 무릇 남자들도 아름다운 여인에 목숨을 걸고, 여자들은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 마음을 다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인간은 아름다움을 바라지만, 그곳에 이르기엔 결핍이 많은 존재다.
인간은 먹고, 입고, 자며, 몸을 단련하고 육체를 잘 보전해 가려 하지만, 사람이 ‘등 따숩고 배불러’ 만족한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있을까. 인간은 물질적 안락 외에 정신적 풍요를 원하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예술을 추구한다. 물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방법은 여러 갈래이지만, 예술이 유한한 인간의 삶에 위로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가 풀과 같이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영혼에 간직된 아름다움이다. 세상 속에서 알게 된 아름다움이 눈과 귀 같은 감각기관을 거쳐 영혼에 각인되어 그 아름다움을 구현해 낸 것이 예술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소설 중 《백치》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소설에서 주인공 므이시킨 공작을 가장 아름답고 선한 존재로 묘사했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묻는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인가.”
므이시킨은 백치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소설 속의 아글라야는 므이시킨에게 말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느니 하는 말 따위를 늘어놓는다면, 앞으로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결국 므이시킨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백치로 돌아가게 되고, 그가 사랑과 연민으로 보호해 주고 싶었던 두 여인은 죽거나 실패작으로 남는다.
세속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어찌 구할 수 있으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예수도 세상을 구원할 아름다운 뜻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통과 죽음을 그 대가로 치르지 않았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조화롭고 균형 잡혀 있어, 인간의 영혼에 기쁨과 충만감을 주는 가치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창조되었고, 그것을 갈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불멸을 추구하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육체적 사랑으로 자식을 낳아 자신의 불멸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정신적 사랑으로 아름다운 결과물을 창조함으로 영혼을 불멸하게 하려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그러나 세속에 물든 인간은 아름다움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 아름다움은 사랑 속에 있고,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나온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동일한 것이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구원의 방향을 제시하는 한 줄기 빛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끝없이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진실의 광채라 했고, 헤세는 신적인 것의 형상화라고 했다. 아름다움은 진실함과 선함의 가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가장 밝은 빛에 속한 진선미의 완전체가 아닐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예수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면 석가모니처럼 큰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일까.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예술은 덧없는 대상을 영원한 무엇으로 바꿔 놓고, 인간의 고뇌를 아름다움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싸운다. 만일 트로이가 계속해서 행복한 삶을 영위했다면, 그리고 만일 호메로스가 나타나서 살육을 불멸의 시로 바꿔 놓지 않았다면, 세상은 어떤 혜택을 누렸겠으며,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빈곤해졌을 터인가? 하나의 동상, 시 한 구절, 한 편의 비극, 한 폭의 그림….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땅에다 세운 숭고한 기념비다.”
모든 예술 활동은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름다움은 무의미를 의미로,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영혼을 정화시키고 일깨우고 천국을 향해 가도록 살아갈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