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기독교에 대한 오해, 편견, 그리고 진실과 상식
‘종교는 운명’이라는 말처럼 종교, 그리고 기독교는 궁극적이고 거룩한 실재로서의 ‘신’을 찾는 데서 출발했다. 유대교는 ‘야훼Yahweh’를 믿고, 기독교는 ‘갓God’을 믿고, 이슬람교는 ‘알라Allah’를 믿는다. 야훼, 갓, 알라, 하나님은 같은 말이고, 이 세 종교는 뿌리가 같다. 기독교는 다시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로 나뉜다. 오늘날에는 교파가 더 많이 있지만, 이는 성경 해석과 예수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깊이와 넓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믿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개독교’로 이해하거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부르대는 사람들의 종교로만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금발에 푸른 눈의 예수도 잘못된 이미지다.
그래서 기억해야 할 것은, 저자가 말했듯이 예수 가르침의 고갱이는 사랑이고 자비라는 것이다. 예수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 몸을 파는 여성처럼 천시당하고 경멸받은 사람은 물론, 세금을 거두어 가는 세리처럼 백성의 원성을 산 사람들의 손도 잡아주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당부한 예수는 ‘신’으로 모셔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는 어디 있을까?
부활한 예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인문학적 여행
성만찬의 유례, 침례의 기원, 하늘나라에 대한 정의, 590년 최초로 ‘교황’ 칭호를 쓰기 시작한 일 등 기독교의 의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지주의, 마르키온주의 사벨리우스주의,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마리아의 신성을 부정하는 네리토리우스파를 거쳐 기독교 교리가 확립되기까지, 이 책은 한 권의 종교학 입문서를 읽는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받던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고, 니케아 공의회를 거쳐 모두가 동의하는 기독교 교리를 확립한 다음 종교 전쟁을 거치고 교회 개혁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은 한 권의 잘 쓰인 역사책을 읽는 듯하다. 이 밖에도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라는 것, 구약과 신약을 함께 ‘성경’이라고 부른 것은 4세기 후반이라는 것, 교회 개혁가 루터를 비판했던 뮌처에 대한 이야기 등을 읽노라면 책 곳곳에서 빛나는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할 것이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회중교, 퀘이커교 등 크리스천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교파, 방언에 대한 여러 학설, 한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비교한 설명은 어느 책보다도 쉽고 탁월하다.
기독교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한 독자, 작은 떨림으로 믿음이 흔들리는 기독교인, 부활한 예수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크리스천, 2014년 현재 보잘것없고 어려움에 처해 고통받고 있는 우리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 이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조로아스터교와 지형적 영향을 받아 모두 유일신을 믿지만, 그 유일신의 이름은 각각 다르다. 유대교는 ‘야훼(Yahweh)’를 믿고, 기독교는 ‘갓(God)’을 믿고, 이슬람교는 ‘알라(Allah)’를 믿는다.
저마다 유일하다고 믿는 신의 이름이 다르기에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가령 기독교는 이슬람교의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도 이슬람교의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예수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흔히 ‘적대적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짚고 갈 진실이 있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갓’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갓’을 이슬람교에서 번역하면 ‘알라’가 된다. 실제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대교와 뿌리가 같다. _30~31쪽
핵심은 예수가 그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친 데 있다. 그러니까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과 선을 그으며 거듭난 예수는 광야에서 나와 ‘차별의 땅’ 갈릴리로 돌아간다. 사람들을 일깨워가기 시작한다. 기독교는 그걸 ‘복음’으로 부른다. _63쪽
부활한 예수는 베드로를 찾아간다. 스스로에게 절망한 베드로는 본디 생업인 어부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베드로의 그물에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도와준다. 그때서야 비로소 베드로는 ‘낯선 사내’가 예수임을 깨닫는다. 예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생선으로 아침을 차려준다.
이어 베드로를 따로 불러 묻는다.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흔히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성경이 기록한 그 순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_89~90쪽
베드로는 유대인들 사이에, 바울은 비유대인들 사이에 예수의 가르침과 부활을 전도해나갔다.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바울은 참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도한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서술한 게 신약성경의 절반에 이른다. 바울은 서기 67년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손에 순교할 때까지 기독교를 세우는 데 헌신했다. 그의 열정적인 전도 활동으로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민족 종교의 틀을 넘어 세계 종교로 커갈 수 있었다. 바울은 예수를 통해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3:28) _94쪽
기독교와 유대교는 처음부터 몹시 불편한 관계였다. 무엇보다 예수의 처형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는 로마인이 아니라 자기 동포인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았고,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로마 총독에게 제소되어 처형당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베드로와 바울을 박해한 주체도 주로 유대인이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종교 질서를 문란하게 했으며 ‘혹세무민惑世誣民’했다고 판단했다. 예수를 처형한 뒤에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박해한 이유이다. 특히 개종 전의 바울이 그랬듯이 율법을 엄격하게 지켰던 유대교인이 앞장섰다. _102~103쪽
어떤 사람이 ‘신의 나라’, ‘하늘나라’를 사람이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수준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예수는 물론 기독교를 전혀 모른다는 자기 폭로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나라는 예수가 가르쳐준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공간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다.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는 삶일 수도 있다. _143~144쪽
레오 10세는 이미 또렷해진 르네상스 흐름에 조응해 학자, 문인, 예술가 들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로마의 문화적 번영을 일궈나갔다. 하지만 ‘재벌’의 아들로 소년 시절에 이미 추기경이 된 그의 끝없는 사치 생활로 인해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성베드로 대성당(산피에트로 대성당)을 건립한다는 명분으로 ‘면죄부’ 판매를 단행한다. 기독교 역사의 큰 획인 ‘교회 개혁’ 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계기는 그렇게 찾아왔다. _169쪽
루터는 뮌처와 정반대 쪽에 섰다. ‘강도와 도적 같은 폭동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직접 글을 쓰고 발표했다. 루터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어겼고, 강도와 도적질로 공공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했으며,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하려고 성경의 복음을 끼워 맞춰 “신을 비방하는 죄”를 범했다고 몰아세웠다. 이어 ‘공권력’을 가진 정부는 농민들의 ‘폭동’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라며 “미친개를 죽이듯 목을 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라”는 살벌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_222쪽
조지 부시의 ‘십자군적 소명감’은 그가 대통령 재선에 나섰을 때 선거 자금을 모으는 데에도 적극 ‘활용’된다. 2004년 대선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의 선거운동본부 의장인 마크 래시콧Marc Racicot은 2004년 4월 3일 선거자금 모집책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시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를 강하고 변함없는 지도력으로 이끌어왔다. 우리 공화당의 대통령은 테러리즘에 대항해 전 세계적인 십자군 전쟁을 이끌고 있다”고 자화자찬한다. _263쪽
20세기 프랑스인들로부터 ‘살아 있는 성자’로 존경받았던 아베 피에르Abbe Pierre 신부도 청소년 시절 수학여행 때 들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감명을 받아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독일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피에르는 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단언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과 ‘타인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피에르 신부는 그 차이를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라고 풀이했다. _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