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1] 소년의 가혹한 상처와 '강철 인간(Stalin)'의 심리적 기원
스탈린은 훗날 권좌에 오른 뒤 자신의 공식 생일을 조작할 만큼 자신을 철저한 신비주의 장막 뒤에 숨기고자 했다. 그가 이토록 철벽같은 방어 기제를 세운 까닭은 그루지야 고리시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 겪은 유년기의 참혹한 학대와 비극에 있었다. 구두 수선공이자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 베사리온은 상습적으로 어린 스탈린과 어머니에게 잔혹한 폭력을 휘둘렀고, 소년 소소(스탈린의 아명)는 매 맞는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칼을 던지며 저항해야 할 정도로 분노와 복수심을 내면화하며 자랐다. 게다가 여섯 살 무렵 앓은 천연두로 얼굴에 얽은 곰보 자국과 마차 사고로 왼쪽 팔이 평생 불편했던 신체적 결함은 소년에게 씻을 수 없는 결핍과 지독한 피해망상의 씨앗이 되었다.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어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던 어머니 케케의 애지중지하는 과잉보호 덕분에 소년은 명문 티플리스 정교회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과 제국,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신학교의 엄격한 감시 체제와 교장 게르모겐, 장학사 아바시제의 숨 막히는 독방 감금 징계는 소년의 영혼을 맑게 가꾸기보다 오히려 이중적이고 반골적인 혁명가로 탈바꿈시켰다. 소년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지하 서점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철학 서적을 탐독하고 금서를 베껴 쓰며 차르 전제 체제를 밑바닥부터 뒤흔들 파괴적인 볼셰비키 투사로 각성해 나갔다.
학창 시절 스탈린은 조지아어 신문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발표하여 당대 문단에 이름을 올릴 만큼 뛰어난 지적 갈망과 예술적 섬세함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거리로 나선 그는 싸움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규칙 위반과 교활함, 물리적 폭력을 서슴지 않고 휘두르는 악명 높은 골목대장이기도 했다. 유년기의 끔찍한 학대와 정교회 신학교의 억압적인 종교 교육은 소년의 모순된 두 내면을 기이하게 결합시켰고, 훗날 자신에 대한 비판을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했던 무자비한 '강철의 인간(Stalin)'을 탄생시켰다.
[2] 레닌과의 숨 막히는 암투, 그리고 권력 피라미드의 정상
혁명 이전 지하 활동 당시 평범한 ‘행정 실무자’나 거친 행동대장 정도로 과소평가 받았던 스탈린은 사실 누구보다 뛰어난 실천적 조직가이자 정교한 정치가였다. 1917년 10월혁명 전후로 당의 핵심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편집장을 맡아 실질적인 무장봉기 계획을 조율한 그는, 1922년 당의 서기장(General Secretary)이라는 지극히 관료적이고 따분해 보이는 행정 요직을 차지했다. 스탈린은 모두가 방심한 사이 지방 당 조직의 핵심 인사권과 당의 서기국 조직을 완전히 움켜쥐며 권력의 피라미드를 차근차근 설계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권력 구조 개편을 둘러싸고 스승인 레닌과 깊은 마찰을 빚던 스탈린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파동을 맞이하게 된다. 투병 중인 레닌을 면회하는 규칙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레닌의 정치적 지침을 바깥으로 실어 나르며 정치국의 규율을 어기던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에게 스탈린이 전화로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언어폭력을 퍼부은 것이다. 이에 분노한 레닌은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며 "스탈린은 너무 거칠고 무례하므로 서기장직에서 제거하라"는 내용이 담긴 역사적인 '레닌의 유유(유언장)'를 구술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직후 열린 제13차 당 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마침내 이 파괴적인 유언장이 폭로되는 일촉즉발의 순간이 찾아왔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완전히 끝장날 수 있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분필처럼 창백하게 질린 채 판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강력한 라이벌 트로츠키의 부상을 극도로 경계했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감싸 돌며 유언장을 철저히 비밀의 장막 속에 묻어두기로 합의하는 오판을 내렸고, 스탈린은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기회를 잡은 스탈린은 이 삼두정치 연합마저 차례로 무너뜨리며 정적들을 잔혹하게 몰아내고 일당 독재 체제의 절대 권력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3] 대공포(Great Terror)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부활한 '인민의 차르'
1930년대 말, 소련을 피와 공포로 물들인 대공포(Great Terror) 정치는 스탈린의 서늘한 이성적 계산과 극단적인 피해망상이 빚어낸 체제 유지의 핵심 도구였다. 수백만 명의 혁명 동지와 일반 시민을 강제노동수용소(굴라크)로 보낸 이 숙청 작업은 결코 맹목적인 광기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당시 비밀경찰수장 예조프가 가져온 약 4만 4,000명의 숙청 대상자 명단과 사진첩 383권을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 장씩 손수 꼼꼼히 검토해 서명했으며, 몰로토프를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개에게는 개죽음을!" 같은 참혹한 사형 판결 문구를 손수 휘갈겨 넣었을 만큼 차디차고 조직적인 기획하에 공포를 지휘했다.
인명 경시와 잔혹함의 극치는 제2차 세계대전(대조국수호전쟁)이라는 사상 초유의 비극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적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반역으로 규정한 가혹한 '명령 270호'를 고수했던 스탈린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친아들 야코프마저 차갑게 외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잔인하고 비정했다. 그러면서도 루스벨트, 처힐 같은 서방의 거두들을 상대로 테헤란과 얄타 회담에서 압도적인 지정학적 수완을 발휘해 소련을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로 단숨에 격상시켰다.
"사람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살아가야 할 차르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굳게 믿었던 스탈린은, 역사 속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의 피비린내 나는 전제정치를 부활시켜 자신을 ‘인민의 어버이이자 자애로운 차르’로 완벽히 신비화했다. 평생을 찬란한 개인숭배 의식 속에 살았던 그였지만, 정작 퇴근 후 머물던 고독한 블리즈냐야 별장의 책상 서랍 속에 감추어둔 비밀 서랍에는 세 장의 종이가 보관되어 있었다. 자기를 향해 더는 암살자를 보내지 말라던 유고 티토의 살벌한 암살 경고 쪽지, 처형 직전 "코바(스탈린의 별명), 왜 내 죽음이 필요하지?"라고 부르짖은 동지 부하린의 마지막 절규 편지, 그리고 레닌이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했던 절교 서한은,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이 제왕적 독재자가 실은 평생을 불신과 불안, 그리고 고독이라는 심리적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던 비극적인 인간이었음을 서늘하게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