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해설
시인들은 멀리 과거와 대화하고, 더 멀리 미래와도 이야기를 나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우선 ‘사람’이며, 나아가 “생물학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나무와 풀과 꽃과 소통하는가 하면, 물리적으로 구별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바위와도 무람없이” 지낸다고도 했습니다. 정선희가 20억 년 전 지질 시대를 탐색하고, 중생대의 공룡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한없이 초라한 존재자인 인간의 유한성을 투철하게 인식한 결과입니다. 또한 드넓은 우주의 운행과 그것을 따라 생멸하는 다양한 생명들을 살핀 것도 종당에는 인간애로 귀결된다는 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시인이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만 사유한 게 아님도 보았습니다. 그는 순간과 찰나를 보았고, 거기서 ‘초록’과 ‘슬픔’과 ‘우울’의 진정한 의미가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탈주체화와 일의성임을 알았습니다. 그 극점에 이르러 정선희는 ‘모두의 편’이 되고자 하는 시적 열망을 아름다운 표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등단 14년을 맞은 정선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입니다. 『푸른 빛이 걸어왔다』(시와표현)와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상상인), 『엄마 난 잘 울어 그래서 잘 웃어』(상상인)를 잇는 돋보이는 성과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성과가 양적인 데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재와 제재, 표현의 연속성과 더불어 매우 현대적인 철학적 사유가 서정시의 의상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점은 오래도록 시단의 큰 주목을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김재홍 해설 중에서
우울과 슬픔을 건너 발견한 다정한 삶의 방식
“사람의 눈빛을 / 약으로 쓸 때가 있었다”
정선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가 도서출판 이um의 ‘이um 시선 007’로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는 표제작 「초록이 나를 보았다」를 비롯해 「오랜 우울에게」, 「우주적 솔루션」, 「슬픔의 눈금」, 「결핍이라는 자원」, 「울음 동호회」,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 등 모두 59편의 시가 4부에 나뉘어 실렸다.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우울과 슬픔, 결핍과 상처를 밀어내지 않고 삶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전환하는 시집이다. 시인은 일상의 작은 풍경에서 출발해 20억 년 전의 바위와 중생대의 공룡, 태초의 빛과 몽골 사막의 별, 우주를 항해하는 보이저 1호까지 시적 사유의 영역을 확장한다.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을 오가는 상상력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가까이에서는 풀리지 않는 인간의 고민을 더 넓은 자리에서 바라보려는 시적 시도다.
표제작 「초록이 나를 보았다」에서 시인은 물오리의 눈동자에 찰나처럼 떠오른 초록빛을 포착한다. 이때 초록은 사람이 바라보는 자연의 색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을 바라보는 눈빛이 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믿음과 의심,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시집 전반을 흐르는 또 하나의 중심 정서는 ‘다정함’이다. 「오랜 우울에게」에서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우울의 역사가 누군가에게 내밀 손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울음 동호회」에서는 하루치 울음을 비워낸 사람이 한결 가벼워진 달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돌아간다. 시인은 슬픔을 쉽게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상처 입은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용히 곁을 지킨다.
익숙한 가치와 통념을 뒤집는 시적 발상도 돋보인다. 「결핍이라는 자원」은 풍요가 오히려 감각을 무디게 하는 시대에 스스로 ‘불편한 자유’를 선택하고, 「영리한 우울」은 우울을 삶의 비바람을 피하게 하는 방패로 바라본다.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에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과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온 삶을 성찰하며, 자기 자신부터 돌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문학평론가 김재홍은 해설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과 ‘사유’의 현대성」에서 정선희의 시가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을 아우르면서도 결국 사람을 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무는 시적 사유와 우울·슬픔·결핍의 의미를 새롭게 뒤집는 현대적 감각에 주목한다.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정선희 시인이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엄마 난 잘 울어 그래서 잘 웃어』에 이어 펴낸 네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냉소보다 다정함이 오래 살아남으며,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결국 사람의 눈빛과 맞잡은 손에서 온다고 말한다.
우울과 슬픔을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고 새로운 사유와 희망의 언어로 되살린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안부이자, 우리가 끝내 다정함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책 속에서
경계 너머로 부는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던 꽃잎이
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꽃잎의 상상이
자동차의 속도를 얻으면서
한층 더 가까워진 우리
이렇게 바람 속을 부유해도 되는 것인지
봄은 흩날리는 것들의 속도로
더 빠르게 편집된다
깨진 도자기를 수리하는
킨츠기의 기법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인가요
경계나 부위는 중요하지 않아
상처를 덧대거나 숨기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알몸들
부서지는 것들을 생각하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빛의 찬란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 했어요
꽃잎을 따라가다가 헛디딘
발끝에 피어나는
찬란하고 오묘한 빛무리
꽃 아닌 상처란 없다
새로운 지도를 펼치고
누군가의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킨츠기 봄 전문
달밤에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관들이 줄줄이 놓여있는 게 아닌가
꽃으로 둘러 쌓인 관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 돌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머리를 싹둑 잘라놓은 철쭉들
꽃으로 장식한 관처럼 보였다
성당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어젯밤
저 먼 나라 아이들이 화염에 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철쭉으로 만든 관 전문
한때 냉소적인 사람들이
근사해 보였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한쪽 입귀가 올라가며
한 마디 툭,
그들은 말이 많은 사람을 무시하는 투로 말했지
조용한 것을 못 견디는 거죠?
또는 길게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요? 지겹다는 듯
요점만 말해요!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대신
남의 말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르고 토막 내기를 좋아했지
젊은 날 그게 멋져 보여
그들을 따라 배우고자 했지
너는 자존심도 없어?
나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
인간의 본 모습은
보노보사회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다정하다는 것은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말
왜 좋은 것을 두고
남의 것을 부러워했을까
나는 나를 좀 더
다정하게 대하기로 했어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
꼭두각시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아직도 어디선가는 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무대 뒤에서 인형들을 조종하며
그는 신이 된 기분을 즐긴다고 한다
가끔 내 팔다리를 묶어 누군가 끌고 다닌다
그의 짓일까 조종하는 대로
나는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살살 좀 하라고
소리치려는데, 그는 내 입을 만들지 않는다
-꼭둑각시 전문
바다에 가면
낚시 포인트가 있는 것처럼
저마다의 생활엔 웃음 포인트가 있다
어제는
배달 오토바이 쌓인 박스 위 만물상을 보고
웃음이 빵 터졌다
소꿉장난하듯
작은 행성에 큰 나무 세 그루뿐인 어린 왕자의 별처럼
한낮의 인형뽑기방에서 뽑은
자랑스러운 전리품들인가
만세를 부르는 갈색 옷 고릴라도 있고
눈가에 멍이 든 짱구 인형도 있고
-웃음 포인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