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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문어

해제: 이자벨 스탱게르스와 윌리엄 제임스의 ‘공명’
원문: The Ph.D. Octopus
저자 소개
저자 :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미국 심리학회 의장,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 원사, 하버드 대학 교수, 실용주의자, 미국 기능주의 심리학 학파의 창시자이자 미국 초창기 실험주의 학자 중 한 명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세운 그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미국 뉴욕의 목사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던 조부 덕분에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의 조부가 이리 운하(Erie Canal)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오랫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 철학, 생리학을 가르쳤다. 그는 그곳에서 미국 최초의 심리학 수업인 〈생리학과 심리학의 관계〉를 개설했을 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심리학 실험실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심령학연구회의 주요 창립자이기도 한 그는 평생 초개인(超個人)의 심리 현상과 초심리학(超心理學)을 연구하며, 인간의 정신생활에는 생물학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며 특정 현상을 통해 ‘초월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총 7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주요 저서로는 『심리학 원리』, 『진리의 의의』, 『다원적 우주』, 『교사가 심리학과 학생에게 들려주는 심리학』, 『경험론 논문집』 등이 있다.

해제 : 이유선
서울대학교 학부대학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버지니아대학교에서 리처드 로티의 지도를 받아 박사 후 과정을 이수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공공성과 민주주의의 가능성」 「실용주의 철학에 대한 이론적 고찰」 「자유와 사회적 실험」 외 다수가 있고, 저서로는 『리처드 로티』 『사회철학』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실용주의』 『듀이&로티: 미국의 철학적 유산 프래그머티즘』 『행복이 정말 인생의 목표일까』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등과 다수의 공저가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재구성』 『정의에 대한 6가지 철학적 논쟁』 『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 『해석학과 과학』 『과학과 가치』 등이 있으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공공성과 그 문제들』 『퍼스의 기호학』 등을 공역했다.

역자 : 김수현
대학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하고 생체 재료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공계 전공자로 학문을 배우는 동안 부족했던 인문사회과학 분야 지식에 관심을 갖고 독립적으로 공부를 하던 중 대학의 학위 제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윌리엄 제임스의 글을 만나 번역을 통한 대중 글쓰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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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왜
윌리엄 제임스를 소환하는가

『박사 문어』는 2025년6월 에디토리얼 출판사가 펴낸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 선언』(이하 『느린 과학』)의 자매도서라고 소개할 수 있다. 『느린 과학』의 프랑스어 초판에는 윌리엄 제임스의 「박사 문어」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철학)을 연구하는 소장학자의 해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스탱게르스는 본문 안에서도 윌리엄 제임스의 이름과 그의 실용주의의 골간을 이루는 개념들을 여러 곳에서 언급한다. (참고로, 한국어판에는「박사 문어」 대신 루드비크 플렉의 ‘사고집단’과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의 비교를 통해 과학을 느리게 하는 과제를 숙고하는 글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한국어판 『느린 과학』에 포함시킬 수 없었던 윌리엄 제임스의 흔적을 찾아나선 자그마한 결실이다.

두 철학자의 ‘진정한 선택’

2025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76.3%로, 17년째 OECD 1위를 기록했고, 2024년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국외는 제외)만 해도 1만7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e-나라지표 통계) 상전벽해의 변화를 보여주는 수치 앞에서 “대학원은 여전히 다소 생소하고, 고등 학위는 드문 편”이라는 제임스의 서술을 읽으면 낡은 글이라는 생각이 앞설 수도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 대학원과 고등 학위는 흔하디흔한 것이 되었고, 박사학위가 이름을 장식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 전반은 물론 고등 교육이 이대로 방치되어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이 어떻게 병들었는지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 우리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한때 우리가 그렇게나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의 깊은 취약성”(『느린 과학』, 187쪽)을 드러내는 것이 난맥상을 풀어낼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가 직면한 종류의 미래가 윌리엄 제임스가 진정한 선택지(genuine option)라고 말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고 싶다. 즉 그것이 제기하는 도전에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것 외에는 설 곳이 없기 때문에 결국 피할 수 없는 선택지라는 것이다.” 『느린 과학』에서 스탱게르스가 제임스를 가장 먼저 언급하는 구절이다. ‘진정한 선택(지)’의 원작자인 제임스의 설명은 책의 ‘해제’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다양한 선택지에 직면하는데 어떤 선택은 우리가 쉽게 피해 갈 수 있는 반면 어떤 선택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즉, 그 선택지는 살아 있거나 죽은 것, 강요되었거나 회피 가능한 것, 중대하거나 사소한 것일 수 있는데, 살아 있고, 강요된 것이며, 중대한 선택일 경우 제임스는 그것을 ‘진정한 선택’이라고 불렀다. 진정한 선택이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답해야 하는 종류의 선택이며, 탐구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제, 『박사 문어』, 34쪽)

파괴된 조건을 긍정한 채 나아갈 수 있는가

스탱게르스는 2000년대 초 학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학계가 그런 운명에 처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괴되는 것이 학계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무수히 많은 다른 파괴들로 인해 미래를 다루는 자원들이 체계적으로 근절되고, 절망과 냉소에서 벗어나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체계적으로 차단되는 상황”이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거부하는 방식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거나 깊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처지에서 그는 어떤 결기에 이른 듯 이렇게 쓰고 있다. “각종 권위들이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어렵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가피한’ 조치들”에 계속 굴복하며 “생존을 위해 바로 따라야 하는 끊임없는 요구에 부응하느라 너무 바빴다는 슬픈 이야기”로 자신을 합리화하기에만 급급할 것인가. 이것은 진정한 선택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제임스는 20년간 하버드의 시스템 운영을 관찰하며 결함과 부조리함을 목도했다. 고등 학위제는 독창적인 연구를 장려하려는 바람직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진리를 향한 열망에 부수적 보상을 제공하여 그 열망을 더욱 고취할 수 있고, “숙련된 전문성을 입증하고 장벽을 성공적으로 뛰어넘었다는 표시”가 되므로 학문적 야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도전을 장려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필요와 동기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대규모로 제도화하는 것은 항상 형식주의로 치닫고, 배제와 부패를 저지르는 예상치 못한 힘의 전횡을 낳는 경향”이 있었다.

“재능의 자유로운 계발을 방해하는 현상, 교직의 자연스런 수요와 공급을 저해하는 현상, 학문적 허영을 조장하는 특권 기관의 위세, 한 인간의 가치를 본질이 아니라 외관의 휘장에서 찾는 현상, 희망을 꺾고 불공정한 감정을 조장하는 현상, 진리에 직면하려는 뜻을 품은 젊은이들의 의지를 시험에 합격하는 데로 돌리는 현상.” (본문 13쪽)

그는 이런 현상들이 제도의 결함에 기인하므로 제도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여기며, 대중 역시 제도적 결함을 축소하는 일의 중요성을 예리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양자가 실패할 경우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선례를 통해 그 파급을 단언한다. (그는 아버지의 교육 철학의 뒷받침으로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학교에서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의 정교한 대학 체제는 개인을 억압하고, 독일은 귀족제가 양산한 계급과 등급이 우글거리는 나라다. 영국의 기사 작위 제도도 독일에 못지않다. 제임스는 유럽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 미국을 떠받치는 정신을 “개인의 개성과 순수한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보았고 그것을 교육이 함양하고 보존해야 할 정신으로 여겼다. 학문적 허위의식, 속물근성을 걷어내고 그 폐단을 똑바로 직시할 것을 당부하는 결어에서 우리는 제임스의 ‘진정한 선택’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 미국인들 역시 결국 훨씬 더 천박한 수준에서 비슷한 허영을 갈망하게 될 운명인가?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성은 어떤 칭호 부여 제도에 의해 인장되고 허가되고 인증받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될 것인가? 우리의 오랜 민족적 기질이 충분히 오래 활력을 유지하여, 이처럼 비겁하고 추한 미래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기를 간절히 기원하자!” (본문 22쪽)

오늘날 과학/학문은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가

이 책의 실질적 본문에 해당하는 ‘해제’는 「박사 문어」의 지층에 저류하는 제임스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해설, 그의 철학이 어느 지점에서 스탱게르스와 조우하는지를 고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박사 문어』와 『느린 과학』을 나란히 놓고 읽으며 두 철학자의 생각이 어떻게 조응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지식을 늘리는 독서 이상의 자극을 줄 것이다. 또한 실용주의를 전공한 학자가 드문 한국 철학계에서 이 책을 통해 신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의 지도를 받은 이유선 교수의 해제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익한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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